내가 작가 이나경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6년 가을이었다.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다수파>라는 제목의 단편을 읽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아마도 그가 웹진 거울에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다른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다수파>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세계는 놀라우리만치 정연히 정돈되어 있었고, 수수하지만 섬세했으며,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능숙히 원하는 바를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이나경은 등장 때부터 이미 완성된 작가였다. 부러웠다.
<다수파>는 작가 이나경의 대표작인 동시에 비운의 작품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다수파>는 종이책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물론 책으로 엮여야만 작품이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환금성을 갖추어 작가에게 충분한 수익이 돌아가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현재 이 작품은 온라인 장르문학 플랫폼 ‘브릿G’에서 유료로 구매할 수 있다.
김초엽, 오정연, 이루카, 박해울, 천선란, 황모과 등 걸출한 SF 작가들을 배출한 ‘한국과학문학상’의 첫회 심사평 중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다’로 시작하는 어떤 작품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지만, 과학소설로 보기 어려워 탈락했다는 언급이다. 다른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종합해 추측하건대 나는 이 작품이 이나경의 <다수파>일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SF가 아니라는 평가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이 작품은 SF다. 그것도 정말 끝내주게 훌륭한 SF.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다수파>의 주인공인 ‘상식’은 이름처럼 누구보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남자다.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았고, 적당한 시기에 결혼해 딸을 낳았으며, 저지른 일탈이라고는 고작해야 퇴근길에 박카스를 연거푸 마시거나 사무실에서 몰래 무협지를 읽는 정도가 전부인 평범한 사람. 하지만 그 평범함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능력이다.
어느 날 상식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묘한 설문 이벤트에 참여하고, 이벤트의 담당자인 ‘한기’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알게 된다. 놀랍게도 그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언제나 다수에 속하는 답변을 선택한다는 점이었다. 쉽게 말해 그는 언제나 대세를 고를 줄 아는 초능력자였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 누구보다 평범하기에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
<다수파>가 SF인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 작품은 SF의 중요한 기법 중 하나인 ‘외삽’(外揷, 특수한 가정을 현실에 삽입해 그 결과를 상상해보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야, 내가 찍은 사람 다 잘됐어’, ‘내가 재밌게 본 영화는 다 천만 찍더라’ 같은, 사람들의 흔한 허풍이 정말 현실이 된다면? 언제나 다수 여론과 일치하는 평범의 화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다수파>는 이러한 가정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보인다. 꼭 과학 이론이나 첨단 기술을 논하지 않더라도 SF 장르의 규칙과 이야기 전개 방식을 따른다면 그 작품은 SF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설문 이벤트를 주관한 ‘수도 그룹’은 상식을 자문위원으로 초청해 그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업에 활용하기 시작한다. 상식이 선택한 색상이 놀랍게도 그해의 유행 컬러가 되고, 상식이 고른 디자인의 상품은 항상 대박이 난다. 상식의 능력 덕분에 수도 그룹은 벌이는 사업마다 승승장구하고, 상식 또한 적당한 자문료를 받으며 편안한 생활을 이어간다. 상식은 자신을 세상의 왕이라 착각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가 뽑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상식은 세상의 대세에 올라탈 수 있는 자신의 재능에 기세등등해 한다.
어떤 사건을 겪게 되기 전까지는.
스포일러를 피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표현하자면, 상식은 어떤 비극적인 재난에 휘말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 일은 국민 다수가 함께 겪어야 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에도 물론 그는 여전히 다수의 여론과 함께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는 재난의 피해자라는 소수자로서의 삶도 살아가야 한다. 그 사건 이후로 상식은 다수파이자 소수파가 된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수이자 소수로서 살아간다. 자신을 특별한 소수로 포지셔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또한 동시에 다수가 되기를, 다수에 소속되기를 강하게 욕망하곤 한다. 일견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 모습은 너무나 타당하다. 사람을 구분 짓는 층위는 한없이 세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에서 다수파인 나는 어떤 분류 속에서는 소수가 된다. 우리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언제나 소수자일 수밖에 없다.
재난의 피해자가 된 상식은 자신이 뽑은 대통령에 맞서 투쟁을 시작한다. 국민들의 여론 또한 상식에게 우호적이다. 왜냐하면 상식은 언제나 다수파에 속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수년간의 지난한 투쟁에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호적이었던 사람들도 어느새 하나둘 지쳐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고, 세상은 거꾸로 상식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결국 상식은 투쟁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상식은 언제나 다수파에 속하는 사람이므로.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나였고, 당신이었고, 우리 모두였는지도. 우리는 상식과 함께 2014년 4월의 사건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실은 소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상식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광장으로 향했다. 함께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서서 누군가를 몰아내려 했던 겨울, 그 열망의 한가운데서 나는 언제나 이 작품을 떠올렸다. 지난한 기다림 끝에 헌법재판소에서 선고가 이루어지던 날에도 나는 이 작품을 생각했다. 씁쓸한 결말로 끝났던 이 이야기에 드디어 새로운 한줄을 덧붙일 수 있게 되었다고.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싸움에 나선 상식이 결국은 승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다시 몇년이 흘렀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많은 일이 있었다.
2021년이 시작된 시점에서 다시 돌이켜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완전히 새로 쓰여야만 할 것만 같았던 <다수파>의 결말이 어째선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니까. 바뀌어야 했을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고, 진즉 끝났어야 할 싸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변화는 요원하기만 하다. 너무 순진한 기대였던 걸까.
생각해보면 그 긴 시간 동안 <다수파>는 한 글자도 고쳐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해왔다. 달라진 것은 오히려 내쪽이었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만 매번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작품에 대한 감정이 점점 옅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랬어야 했고. 하지만 어쩐지 점점 더 크고 중요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슬프게도.
어영부영 타자를 두드리는 동안에도 바삐 시간이 흘러 어느새 1월이 끝나가고 있다. 4월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