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들이 서울을 헤매던 윤복(김천만)과 태순(이지연)을 찾아낸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제작 신필림 / 감독 김수용 / 상영시간 102분 / 제작연도 1965년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지만 가장 앞단에 자리한 장르라 할 실화나 수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가 가능하다. 특히 어린아이의 작문이나 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불우하고 가난한 삶을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 대표작을 꼽자면 일제강점기 소학교 4학년생 우수영의 작문을 원작으로 한 <수업료>(1940), 재일교포 소녀 야스모토 스에코의 일기를 엮은 <니안짱>을 원작으로 유현목이 연출한 <구름은 흘러도>(1959) 그리고 대구 명덕국민학교 5학년이던 이윤복의 일기를 영화로 만든 <저 하늘에도 슬픔이>이다. 말 그대로 전 국민을 눈물바다에 빠트린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은 이윤복의 실제 삶과 6개월치 일기 출판, 일련의 미디어 보도 그리고 영화화가 긴밀하게 맞물려 진행된 흔치 않은 사건이었다. 윤복의 사연이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64년 11월 15일 <저 하늘에도 슬픔이-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가 신태양사에서 출판되면서다. 곧이어 언론은 이윤복의 가족사와 소년의 일기장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경위를 앞다퉈 전한다.
껌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윤복은 동생 순나, 윤식, 태순 그리고 병든 아버지를 돌보며 움막에서 살아간다. 어머니는 집을 나간 지 5년이 넘었고,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 일을 할 수 없다. 사실 생계는 유지되지 않는데, 껌이 팔리는 날에는 국수를 사서 나눠 먹고 껌이 팔리지 않는 날에는 깡통을 들고 동냥밥을 얻으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가족 모두 며칠씩 굶는 일도 예사다. “짐승이 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라는 윤복의 표현처럼 1960년대 중반 빈민의 삶은 지금의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처참했다. 윤복이 3학년 때부터 쓴 일기를 읽고 사정을 알게 된 김동식 교사는 윤복의 가족을 도와주는 한편, 한국판 ‘니안짱’으로 세상에 알리기 위해 출판을 결심한다. 후배 박용웅과 함께 힘들게 출판을 타진하고 결국 성사하게 된다.
소년 이윤복을 찾습니다
하지만 윤복은 책이 나오기 직전, 1년 반 전 집을 나간 순나를 찾으러 둘째 여동생 태순과 집을 나가버려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자신의 일기가 책으로 나온지도 모르고 서울을 헤매는 중이다. 책을 읽고 감동한 대구 효성여고 학생들이 쌀과 성금을 모금하는 등 각계의 관심이 커지는데도 정작 윤복은 나타나지 않는다. 12월 초부터 언론이 나서 이윤복군 찾기 운동이 전국적인 관심으로 번지고 다행히 21일 남대문의 걸인숙소에 있던 윤복과 태순을 찾아 데려오게 된다. 여기까지가 영화가 담아낸 이야기다. 그사이 책은 재판을 찍었고, 그해 6만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윤복이 집으로 돌아오고 12월 25일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영화화 계약이 이루어진다. 계약금 25만원과 성금 관리는 명덕 국민학교 교사들로 구성된 이윤복수기출판관리위원회가 맡았다. 1월 초 김동식 선생이 원주에서 여동생 순나를 찾아 데려왔고, 어머니 역시 찾았지만 이미 재가해서 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살던 움막을 버리고 새집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윤복의 수기를 영화로 제작한 곳은 연극연출가 최현민과 배우 장민호가 만든 경화프로덕션이다. 공식적인 제작사는 신필림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등록된 제작사만 영화를 만들 수 있던 시절 중소 프로덕션이 ‘대명 제작’으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1965년의 한국영화 제작편수 189편 중 영화법에 의해 등록된 영화사가 만든 작품은 26편뿐이었고 나머지는 독립 프로덕션들이 큰 회사의 이름을 빌려 외화쿼터용 편수를 채웠다. 시나리오는 신봉승, 감독은 <혈맥>(1963)에서 남루한 해방촌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연출했던 김수용이 맡았다. 1월 중순 김수용은 윤복을 찾아가 빈민촌 일대와 껌을 팔러 다니던 거리를 함께 다니며 영화화를 구상한다. 영화는 3월 중순 대구 현지의 로케이션으로 촬영에 착수했다. 4월 중순까지 검열 이슈를 겪었던 영화는 5월 5일 국제극장에서 개봉, 한 극장에서만 50일 동안 상영하며 28만5천명의 관객을 모았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어머니
국민적인 주목을 받은 사연이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흥행 성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1965년 최고의 흥행작까지 된 것은 단연 김수용의 연출력이 결합한 결과였다.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에서 윤복(김천만) 가족의 모습으로 시선을 옮기며 영화는 시작한다. 집세를 못내 쫓겨난 윤복 일가가 앞산 밑의 버려진 움막집으로 출발하는 장면이다. 윤복이 끄는 리어카에는 조금의 세간과 함께 아버지(장민호)가 타고 있다. 그리고 언덕 위를 올라가는 리어카의 모습이 작은 실루엣으로 보이는 익스트림 롱숏 화면 위로 크레딧 타이틀이 흘러간다. 세찬 비를 맞으며 움막에 도착하는 가족의 모습은 그들의 앞날이 험난하리라는 걸 말해준다.
김수용은 영화 내내 대상에서 멀찍이 벗어나 관조하는 카메라와 가족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바스트 숏을 오가며 과잉된 감정 묘사가 이뤄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간다. 과도하게 슬픔을 조장하지도 냉정하게 팔짱만 끼고 바라보지도 않는 것이다. 껌을 팔던 윤복과 순나(정해정)가 단속반에 걸려 아동보호소로 잡혀가는 장면도 그렇다. 윤복이 다방에서 나오다 트럭을 발견하고 도망가기 시작하면 부감의 익스트림 롱숏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윤복이 잡히면 순나와 부둥켜우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차 안 아이들의 시점으로 거리의 모습이 보이는 것까지 세련되게 쌓여가는 숏의 연쇄는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모두 네번에 걸쳐 등장하는 어머니(주증녀)의 묘사도 흥미롭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며 나간 후 자신의 꾸지람에 집을 나간 순나 때문에 가책을 느끼는 윤복은 다리 위에서 어머니를 만나 움막으로 같이 온다. 어머니는 거지꼴이 다 된 아이들에게 새 옷과 먹을 것을 주는데, 윤복의 꿈이었다. 이때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이라는 영화의 주제곡 <따오기>가 흘러나온다. 어머니가 나오는 두 번째 순간은 윤복이 배가 고파 동냥을 하다 반 친구 경애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을 때다. 어머니와 깨끗하게 차려입은 동생들의 환상을 본 윤복이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역시 <따오기>가 흘러나온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 속 현실로 설정된다. 이틀이나 굶은 윤복은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 우산도 없이 학교에 간다. 풍경화를 그리는 미술 시간에 엄마 얼굴을 그린 윤복은 김동식 선생의 배려로 음식을 먹는데, 이때 교문 밖에서 우산을 들고 어머니가 기다리지만 둘은 만나지 못한다. 네 번째는 남대문 지하도에서 만난 김동식 선생과 윤복이 신문사가 마련한 비행기를 타고 동촌 비행장에 내리는 장면이다. 역시 어머니가 비행장을 찾아오지만 윤복이 방송국 차를 타고 전교생이 반기는 교정으로 가며 엇갈린다.
어머니까지 만나는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영화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이는 실제 어머니의 사정을 반영한 대목이기도 하겠지만 감독의 입장을 밝힌 것임에 분명하다. 오프닝 화면과 유사한 느낌의 비행장에서 찍은 엔딩 장면은 가로수 사이에서 점처럼 보이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실루엣은 뛰어가는 네명의 아이와 어머니와 아버지로 추정되지만 충분한 해피엔딩의 느낌은 아니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점처럼 보이는 윤복의 가족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든 삶을 살아내야 함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윤복(1951~90)은 마흔도 되지 않아 지병으로 사망했고, 세상을 뜨기 3년 전부터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