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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들과 그년들
2002-05-15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좌파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긴장은 종종 숙명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좌파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부르주아’라 밥맛 없어하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좌파 남성들을 ‘가부장 좌파’라 밥맛 없어한다. 좌파 남성 가운데 (여성해방 없는 인간해방을 좇는) ‘가부장 좌파’가 실재하고 페미니스트 여성 가운데 (인간해방 없는 여성해방을 좇는) ‘부르주아’가 실재한다. 그러나 모든 좌파 남성이 ‘가부장 좌파’거나 모든 페미니스트 여성이 ‘부르주아’는 아니다.

‘그 페미니즘’을 쓰면서 “독자의 2할은 잃겠군” 했다. 좌파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긴장이 숙명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상태에서, ‘좌파 남성 최초의 페미니즘 비판’은 자칫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가부장 좌파의 테러’로 오독되기 십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쌓이는 이메일들과 이런저런 풍문들은 그런 내 예상을 크게 비껴가지 않았다. 오독은 대개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말에서 비롯했다. 딱하게도, ‘주류’라는 말을 ‘진정한’이나 ‘중요한’쯤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 말을 말 그대로 ‘큰 영향력’의 뜻으로 썼고 거기에 ‘90년대 이후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한정을 붙였다.

오독에 대해 말하는 나는 여전히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대체할 말을 알지 못한다. ‘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특정한 유파라기보다는 9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에 나타난 모종의 강력하고 전반적인 경향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페미니즘’은 90년대 이후 일군의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에 의해 수입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여성해방을 인간해방과 별개로 진행한다’는 맹랑한 강령에, (한국식 한풀이에서 마초 흉내에 이르는) 이런저런 통속적 정서들을 결합한 그런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언급했던 <이프>나 최보은씨의 에피소드는 흔히 말하는 ‘자유주의적 도발’이 아닌 ‘급진주의의 극단적 통속화’라 할 만하다.

씁쓸한 건, 오독이 텍스트에서뿐 아니라 한국 페미니즘의 두루뭉술한 상태에서도 일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일부(지만 주류라 비쳐지는) 천박한 경향에 분명한 경멸을 표함으로써 페미니즘의 건전한 부분과 떼내어 보이려는 내 시도를 ‘남 얘기를 내 얘기로’ 알아먹었다. 되새기는 바,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건 90년대 이후지만 한국 여성운동/페미니즘의 역사는 이미 한 세기에 가까운 면면한 것이다. 그들은 출발부터 여성해방과 인간해방을 함께 고민하는 건전한 전통을 가져왔으며 여성평우회, 여성단체연합, 여성노동자회, 여성민우회 등을 조직한 80년대에는 ‘여성의 문제’를 양보하다시피 하면서까지 사회진보에 몰두했다.

90년대 들어 그들은 ‘변화한 사회 상황에 발맞추어 좀더 여성의 문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여성운동의 그런 노선변화를 ‘우경화’라 비판할 수 있는가는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지만(다른 건 접고라도 80년대에 그들이 보인 양보는 매우 특별한 것이기에), 그런 노선변화가 결국 여성해방과 인간해방을 함께 고민하는 한국 여성운동의 건전한 전통과 90년대 이후 등장한 맹랑한 페미니즘이 갖는 차이를 두루뭉술하게 만들어온 건 사실이다. 바야흐로 한국 여성운동/페미니즘의 면면한 역사는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르는’ 몽환적 상태에 접어들고 있다.

좌파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숙명적인 긴장’ 역시 오늘 한국 페미니즘의 그런 상태에서 비롯된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존재하고 인간에 대한 억압이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런 긴장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나만의 해방’을 믿는 모든 운동은 어떤 절실한 사정을 담더라도 그저 피억압자의 추악한 복수극에 불과하다. 좌파 남성들이 그들 가운데 실재하는 ‘가부장 좌파들’을 솎아내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그들 가운데 실재하는 ‘부르주아들’을 솎아낼 때, 비로소 ‘숙명적인 긴장’은 ‘숙명적인 우애’로 바뀔 것이다. 그놈들과 그년들을 솎아내지 않고는, 좌파에게도 페미니스트에게도 미래는 없다.김규항/ 출판인 gyuhang@m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