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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②] 2020년 한국영화는 '되감기'이다

기계의 후진, 두뇌의 후진, 영화의 후진

김소희 평론가 올해 한국영화를 생각할 때 특징적으로 각인된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이 한국영화를 작동시키는 동작이 될 수 있을지 몇편의 영화를 타고 넘어보았다.

<소리도 없이>

어쩌면 올해 개봉한 다종다양한 영화를 묶어낼 하나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나, 나는 올해의 영화들에서 발견한 어떤 행위를 물고 늘어져볼 생각이다. 내게 올해의 한국영화는 되감는 행위로 요약된다. 단순히 한국영화가 향수의 대상으로서 과거를 반추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되감는 행위는 명확한 시대적 좌표 속에 놓여 있지 않다. 거기에는 궁극적인 이유도,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나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되감는 행위 그 자체만이 뚜렷할 뿐이다. 그들은 뒤로 간다. <반도>에서 운전석에 앉은 상태로 난자당한 서 대위(구교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기어를 돌려 후진을 시도한다. 후진은 이를테면 호락호락하게 죽지 않겠다는 마지막 발악이다. 때마침 그를 축복하듯 좀비 떼들이 선박으로 침투한다.

캐릭터가 불가능한 몸짓을 그리는 순간, 감독은 평등한 교환관계를 꿈꾼다. 연상호 감독은 이익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손해를 시각적으로 장면화해 마치 영화적으로 가능한 평등을 실행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부산행>에서 열차 칸을 열어젖힘으로써 집단적 이기심을 응징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복수가 여전히 작동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파괴되면 당신도 파괴되어야 한다는, 내가 손해를 보는 쪽에 속했을 때만 작동하는 잔인한 평등의 디스토피아를 영화는 꿈꾼다. 그렇지만 후진하는 순간만은 캐릭터와 관객 사이의 소통을 위해 오롯이 존재한다. 선명한 악인이던 서 대위는 백스텝을 밟으며 관객의 마음 가까이 다가온다.

비슷한 후진의 순간이 홍의정 감독의 <소리도 없이>에도 있다. 태인(유아인)은 그에게 지시했던 인물들이 하나둘 증발하면서 초희(문승아)를 맡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다. 결국 그는 초희를 유괴된 아이들의 수용소에 맡겨두고 돌아온다. 초희와 헤어지고 돌아오던 태인은 좁은 시골길에 갑자기 차를 멈추고 후진한다. 초희에게로 향하는 태인의 후진은 목적이 뚜렷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뚜렷한 목적이 없는 상태로 이행함을 알린다. 이를 윤리적인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태인은 애초에 윤리라는 개념이 없는 인간이며, 그가 초희를 보호하고 있는 환경도 유괴된 아이들의 수용소에 비해 딱히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태인과 함께 있는 것이 초희에게 최악의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초희를 수용한다는 건 그로 인해 발생할 미지의 위험까지 떠맡겠다는 선택이 된다. 거꾸로 달리는 자동차는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채 관객과 소통하는 태인의 방식을 보여준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

<내가 죽던 날>

앞선 작품에서 ‘되감기’는 어딘가로 돌아가려는 캐릭터의 선택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행위는 <박하사탕>(1999) 속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영호(설경구)의 외침과는 상반된다. <박하사탕>에서 인물이 돌아가는 대신, 세계가 이동했다면 이제 인물들은 단 몇 미터라도 뒤로 간다. 뒤로 가는 행위는 시간을 돌릴 수는 없어도 행위를 멈추고 수정한다. <박하사탕>의 이동이 타락에서 순수로의 이행을 상징할 때, 그보다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이동이 올해의 영화 속에 새겨졌다고 하겠다. 여기에 <남산의 부장들>에서 우회하는 자동차의 부감숏을 덧붙일 수 있겠다. 결말을 바꿀 수 없는 실화영화의 한계는 자신의 운명을 안고 우회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무마된다. 인물을 태운 고급 승용차의 궤적을 바라보는 부감숏은, 어떤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누군가의 죽음이다. 박지완 감독의 <내가 죽던 날>은 사건을 보는 자에게 가능한 시각과 정신의 되감기를 보여준다. 현수(김혜수)는 수사 과정 중에 CCTV에 녹화된 실종자 세진(노정의)의 모습을 본다. 현수는 그냥 지나쳐도 무방할 얼굴에서 자신을 보고, 삶의 의지를 엿본다. 감시의 목적으로 설치되어 수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증거 자료로 이용되는 CCTV 영상은 이제 누군가의 삶을 증명하는 증거물로 되감긴다. 수사 종결을 위해 파견된 현수는 자신이 수사를 종료하는 순간 누군가의 삶이 삭제되어버릴 것처럼 조바심을 낸다. 현수는 마치 실종자의 유령에 사로잡힌 것만 같다. 그녀는 겁을 내기는커녕 꿈에서라도 그와 만나기를 고대한다.

유령과 정신적 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들은 이충현 감독의 <>에서도 등장한다. 현재의 여자 서연(박신혜)과 과거의 여자 영숙(전종서)은 20년을 사이에 두고 전화기를 매개로 소통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기루인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서태지의 음악이다. 영숙이 재활용 카세트테이프를 넣은 채 녹음 버튼을 누르면 서연은 컴퓨터로 서태지의 라이브 영상을 재생해 전화기로 들려준다. 이 순간의 핵심은 클로즈업된 카세트테이프에 있다. 녹음을 시작하면 테이프의 가운데 있는 두개의 구멍은 일제히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테이프의 작동 방식은 누군가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른 누군가는 거꾸로 가야 함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최고치의 화합을 그리는 순간, 테이프는 무심하게 이들이 반목할 앞날을 예고한다. <>은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이 꼭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신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서연처럼 정진영 감독의 <사라진 시간> 속 형구(조진웅) 역시 벗어날 수 없는 새로운 세계 속에 던져진다. 형구의 상황은 서연보다 한층 난감하다. 서연은 적어도 적이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형구의 세계에선 적이 누구인지 보이지 않는다. 형구의 적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마주한 세계 자체다. 자신 외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형구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 애쓰나 그 세계는 이미 삭제된 것 같다. 분열적인 캐릭터는 올해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다.

손원평 감독의 <침입자>에서도 믿을 수 없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뺑소니 사고로 아내를 잃은 서진(김무열)은 사고 트라우마 치료를 받던 중 잃어버린 동생과 관련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다. 놀이동산에서 풍선을 놓쳐버린 아이의 이미지는 어떤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변주되면서 반복되나 결론적으로 이 장면은 맥거핀에 불과하다. 영화가 종국에 선택하는 것은 비밀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비밀을 밝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되감기의 역설

<디바>

<디바>는 용감하게 비밀로 나아간다. 영화 속에는 이중의 과거가 작동한다. 이영(신민아)과 수진(이유영)이 탄 차가 절벽에서 추락하는 순간과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이다. 전자의 비밀은 역재생을 통해 드러난다. 이영이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 죽이는 장면은 결국 수진의 죽음이라는 꼭짓점으로 향한다.

영화는 이영의 기억을 상연하는 증거 화면이 되고 싶은 것일까. 이때 드러나는 진실은 인물이 삭제해버린 것이자 스릴러 장르가 유예시킨 비밀이기도 하다. 비밀이 드러나면서 인물은 자신의 실체를 마주하고, 장르적인 비밀도 완성된다. 그러나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대과거로서 어린 시절의 우정이 존재한다. 되감기는 화면이 말하는 것은 결국 어떤 것은 영영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각각의 영화 속에 드러난 되감기를 공통의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나아간다고 착각하는 영화에 그려진 맹렬하게 후퇴하는 순간만이 역설적으로 나아감을 새긴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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