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 두수(신성일)와 외교관의 딸 요안나(엄앵란)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맨발의 청춘> 제작 극동흥업주식회사 / 감독 김기덕 / 상영시간 117분 / 제작연도 1964년
청춘영화는 19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장르였다. 1963년 <가정교사>(감독 김기덕)와 <청춘교실>(감독 김수용)의 흥행으로 촉발된 청춘영화는 1964년 <맨발의 청춘>의 폭발적인 관객 동원을 계기로 주류 장르로 등극한 후 1967년까지 장르의 생명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청춘영화의 유행이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특히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을 주목해야 한다.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은 <가정교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1962년 내내 부동의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고, <그 녀석과 나>는 <청춘교실>로 번역되어 1963년 베스트셀러 순위를 계속 유지했다. 1963년 한국에서 영화 <가정교사>와 <청춘교실>이 만들어진 결정적 배경이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이시자카의 두 소설이 일본에서도 닛카쓰 제작의 동명영화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감독 다사카 도모타카, 1958)과 <그 녀석과 나>(감독 나카히라 고, 1961)로 만들어진 것이다. 공식적으로 일본영화를 볼 수 없던 시절, 이 텍스트들은 어떤 복잡한 지형도 속에 얽혀 있었을까.
청춘영화의 탄생 배경
1960년대 초중반의 일본문화 수입과 유행은 한일간의 정치 관계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등장한 제2공화국은 대일통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1961년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부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진해 일본 문화 유입에 물꼬를 텄다(하지만 1965년 조인된 한일협정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문화 교류가 제외됐다). 이때 일본 소설의 번역본이 대거 출간되었고 이 소설들은 라디오 전파를 타기도 했다.
1962년 7월 기독교방송(HLKY)에서 80회에 걸쳐 연속 낭독된 <가정교사>가 한국에서 방송된 첫 번째 일본 장편소설이었다. 극동흥업의 차태진이 이 소설의 영화화에 착수한 것도 이즈음이다. 9월 배우 엄앵란이 도쿄로 가 직접 이시자카를 만났고, 이후 “원작료는 필요 없고 잘 만들어주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그의 편지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당시 <가정교사>는 일본 장편소설의 첫 영화화로 큰 화제가 되었다. 현재 이 영화는 사운드필름이 유실된 탓에 제대로 감상할 수 없지만 시나리오를 통해 전체 영화를 가늠할 수 있다. 일본영화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과 <가정교사>의 시나리오를 비교해보면 이 시기 한국에서 청춘영화가 제작되고 유행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언론이 <가정교사>가 이시자카의 소설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쓴 기사는 맞지만 틀린 말이었다. <가정교사>의 시나리오는, 닛카쓰의 1958년작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의 각본(<기네마 순보> 1958년 3월호 게재)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한철의 시나리오는 일본 버전의 지문과 대사를 번역하는 동시에 적절히 한국을 배경으로 번안하고 있다. 한편 이시자카의 또 다른 소설 <그 녀석과 나>는 극동흥업과 한양영화공사의 경작 소동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소설 역시 <가정교사>의 이시철이 번역해 <청춘교실>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는데, 두 영화사에 의해 동시에 영화화가 추진된 것이다. 극동흥업이 원작자 승인을 추진하는 사이 한양영화공사는 먼저 제작신고를 넣고 김수용 감독의 연출로 크랭크인한다. <청춘교실>의 심의 서류를 보면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는 공연권취득증명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원작자가 아닌 번역자 이시철의 인감이 찍혀 있다. 영화에 빨리 착수할 수 있었던 묘수였다. 흥미로운 대목은 한양의 경우 극동처럼 일본영화 버전의 시나리오를 베끼지 않고, 즉 일본영화 <그 녀석과 나>의 시나리오를 전혀 참고하지 않고, 이시자카 요지로의 원작 소설, 정확히 말하면 이시철의 번역본에 기반해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에 극동은 다음 작품으로 <맨발의 청춘>을 추진한다.
베낀 시나리오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다
흔히 <맨발의 청춘>은 태양족영화 <미친 과실>(1956)로 유명한 나카히라 고 감독의 <진흙투성이의 순정>(1963)을 표절한 것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이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극동과 김기덕의 두 번째 청춘영화 <맨발의 청춘> 역시 일본으로부터 영화화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원작의 소설가인 후지와라 신지가 아닌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각본을 쓴 각색자 바바 마사루로부터 거짓 원작자 승인을 받았다. 이는 당시 한국이 세계저작권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상황에서(1987년 가입) 신속한 영화화를 위해 영화사가 취한 행동이었다. 극동은 이렇게 표절 시비를 잠재운 후, 일본영화의 각본을 그대로 번역해(장소와 인물 이름 등 일부는 번안해) <맨발의 청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시나리오상 일본영화의 도입부가 “신주쿠 오후, 어느 뒷골목 주차장”이라면 한국영화는 “명동,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는 식이다. 일본이라는 공간의 특징과 설정, 예를 들어 전차 타기, 그리고 전차 내부와 시부야역, 고라쿠엔 복싱센터, 공회당, 우에노 미술관 등이 <맨발의 청춘>에서는 택시 타기, 그 내부와 택시 정차장, 실내 체육관의 레슬링 경기, 시청 광장, 드라마 센터 등으로 각각 번안되었다.
생전 김기덕 감독은 2005년 필자와의 구술사 인터뷰에서, <맨발의 청춘>은 크랭크인에서 개봉까지 한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는 공보부 심의 서류에서도 사실로 확인된다. 1964년 1월 24일 제작에 착수, 2월 29일 정식 개봉했으니, 당시 한국에서 얼마나 빨리 상업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촬영에 18일 정도 걸렸고, 나머지 기간은 성우 후시녹음, 영화음악 등 후반작업에 할당되었다. 그는 같은 구술에서 “<맨발의 청춘>은 라스트를 끝까지 어떻게 할 거냐를 결정 못해 가지고 맨 마지막 날 찍었어요. 그거를 새벽까지 새로 써가지고 현장에 나가서 촬영을 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거의 복사한 시나리오를 들고 촬영을 시작했지만 그의 연출 과정에서 실질적인 번안이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외국에 나갈 수도 없었고, 그걸 볼 수가 없어. 어떻게 그걸 봐?”라는 김기덕 감독의 항변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진흙투성이의 순정>과 <맨발의 청춘>이라는 두 영화화된 결과물을 비교해보면 그가 일본영화를 베낀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영화는 일본어로, 다른 영화는 한국어로 동일한 대사가 흘러나오지만 두 영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연출되고 촬영되었다.
즉 두 감독의 미장센은 확연히 구분된다. 나카히라 고 감독은 미학적으로 정돈된 숏을 역동적으로 나열하는 편집 방식이다. 또 고정된 카메라로 심도 깊게 응시하는 일본영화 특유의 스타일에 가깝다. 한편 김기덕 감독은 화면 전경에 사물을 걸어놓고 인물을 배치하거나, 인물 동선과 이를 따르는 카메라 무브먼트에 공을 들인다. 두 영화는 대체로 비슷하게 신이 진행되지만 후반부인 100신 이후부터 급격히 달라진다. <맨발의 청춘>은 중요한 장면을 일부러 시나리오에 포함해 놓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후반부 표현 분량이 늘어난다. 시나리오에는 없는 자살 전의 방앗간 장면이 9분 넘게 추가되고, 엔딩에서는 고아인 두수(신성일)를 혼자 장례하는 아가리(트위스트 김)의 장면과 그의 내레이션이 3분 이상 추가된다.
<맨발의 청춘>의 미술, 음악도 시나리오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한국영화만의 요소이다. 두수의 원룸에서 벽 속으로 접히는 침대처럼 19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미술감독인 노인택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영화 전편을 재즈 선율로 장식한 작곡가 이봉조의 영화음악도 신선했다. 오프닝 크레딧부터 등장하는 주제가 <맨발의 청춘> 역시 한국 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다. <맨발의 청춘>은 한달 동안 서울 아카데미극장 단관에서만 무려 15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듬해인 1965년까지 신성일·엄앵란 콤비가 등장하는 유사한 청춘영화가 50편 이상 등장한 것에서 이 영화의 상업적 영향력이 증명된다. 1960년대 청년들은 비록 일본의 이야기를 빌렸지만 근사하게 변신한 청춘영화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