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을 바라는 마음
광주극장
연상호 감독
독립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시절, 특히 <돼지의 왕> 개봉했을 때 GV를 하기 위해 지방 독립예술영화관을 많이 다녔다. 옛날 극장 느낌 나던 곳들이 많이 떠오른다. 겨울에 갔던 광주극장은 페인트로 칠해서 만든 간판이 붙어 있고, 70, 80년대 느낌이 확 나는 로비에, 내부엔 옛날 포스터도 많았다. 극장이 되게 컸는데 가운데만 운영하고 있었다. 공간이 넓다 보니 관객 몇명을 위해 전체 난방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들 담요 같은 것을 받아서 덮고 영화를 보더라. 독립애니메이션을 보러 오는 관객은 20대 젊은 사람들이 많다. CGV 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도 있는데 독립영화에 열정을 갖고 이런 수고까지 감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독립영화에 깊은 애정을 가진 분들과 얼굴을 맞대고 GV를 했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
윤단비 감독
<남매의 여름밤>
자라면서 나는 광주가 늘 답답했다. 시내인 충장로에 놀러 가면 몇 걸음에 한번씩은 반드시 아는 얼굴과 마주쳤고, 내가 어디서 뭘 하면 엄마는 내가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에게서 전해 듣고 내 행적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웃 어른들은 옷이 얇다, 두껍다, 길다, 짧다, 혹은 촌스럽다 등에 대해 늘 첨언했다. 도무지 개성이라곤 존중해주지 않는 동네라고 생각했고, 나는 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그렇다고 뚜렷한 미래의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어려서부터 줄곧 내 미래가 불안했다.
실체는 잘 모르겠지만,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에서처럼, ‘너는 겨우 자라 내가 되겠지’하는 고달픈 자조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나날들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고, 모순적이지만 또 평범해지는 것도 두려웠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들어가지도 못할 원룸의 전단지를 모으는 것이 내 취미였다. 그러다 우연찮게 손그림 간판에 이끌려 광주극장에 들어가게 됐고, 시간대에 맞는 영화를 보게 된 것을 계기로 2층 객석의 대형 스크린,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검열하던 순사관의 자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늘 관객은 몇명 되지 않는 그 오래된 단관 극장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곳은 유일하게 내게 누구도 섣불리 참견하지 않았고, 외롭게 만들지도 않았으며, 미래가 막연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공간이었다. 차이밍량의 복화극장은 비록 스크린에서밖에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광주극장은 여전히 시간을 지키며 자리하고 있다. 그 당시 광주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으로 인해 나는 드디어 꿈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광주극장에 내가 만든 영화가 상영되는 것, 그리고 그 영화는 누군가에게 섣불리 첨언하지 않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85주년을 맞이한 광주극장의 개막작으로 <남매의 여름밤>을 상영하였고, 나는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광주극장은 롤랑 바르트가 영화관을 나오면서 느낀 그 매혹적인 순간에 대해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다. 지금은 광주극장의 100주년에 상영될 수 있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언젠가의 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