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영화 <마틴 에덴>은 경계에 선 자의 씁쓸한 몰락기다. 나폴리의 거친 선원 마틴 에덴은 우연한 계기로 만난 상류층 여성 엘레나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아득한 계급 차를 느낀다. 고급 어휘를 구사하고, 문화적 소양도 풍부한 엘레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마틴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마틴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지적 욕구와 호기심이 내재된 인물이었다. 글을 쓰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까지 더해지며 그는 외적으로도 다른 사람으로 진화하지만, 동시에 상류층 집단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 상황에 처한다. 한편 그가 속한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에 눈떠 조합을 만들고, 마틴 개인은 허버트 스펜서의 진화론적 자유주의에 매료된다. 계급 상승의 욕망은 소속 집단의 목소리를 배반할 수 있고, 조합이 가진 전체주의적 위험을 맹렬히 지적하는 자유주의자는 양쪽 계급 모두에 환영받지 못한다.
20세기는 개인주의적 사회주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사회주의적 아카니즘과 같이 사상 분파가 나뉘어 각자의 목소리를 내던, 역동의 시대다. 그리고 그 경계에 모호하게 서 있던 마틴 에덴은 감독의 표현처럼 지금 시대를 반영하는 현대적 캐릭터로 전위된다. <마틴 에덴>의 몇몇 대화는 신자유주의와 포퓰리즘, 21세기의 파시즘에 관한 논의와 멀지 않다. 교육과 문화산업은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오히려 계급의 사다리를 옭매는 역할을 한다. 혹자는 <마틴 에덴>의 미학에서 루키노 비스콘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흔적을 읽기도 하지만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은 특정한 계보 짓기를 거부하는, 극중 마틴 에덴과 닮은 독학자다. 그는 소설과 영화 속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필름메이킹 방식을 체득한 다큐멘터리 감독이었고 자본주의 영화산업의 획일화를 우려하는 사회주의자다.
<마틴 에덴>은 2019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초연된 이래 영화제 서킷에서 주목받고, 특히 봉준호 감독이 <마틴 에덴>을 “지난 10년간 나온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극찬하며 ‘다음 20년이 기대되는 감독 20명’에 호명해 화제가 됐다. 파리에 체류 중인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과 전화로 나눈 대화를 옮겼다.
-20년 전 각본을 쓴 마우리치오 브라우치가 잭 런던의 원작 소설을 읽고 당신에게 20년 뒤 함께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들었다. 당신의 오랜 친구와의 협업은 어땠나.
=18살 때 그를 처음 만났으니 굉장히 오래된 관계다. 나와 마우리치오는 함께 사회운동을 하고, 정치학을 공부하고, 영화를 만들고, 많은 것을 함께 고민해왔다. 전작 <상실과 아름다움>(2015) 역시 그와 함께 만들었다. 우리에게 <마틴 에덴>을 만드는 것은 오랜 숙원이었다.
-원작 소설은 미국 오클랜드가 배경이나 영화에서 이탈리아 나폴리로 각색됐다. 마틴과 엘레나의 첫 만남에 등장하는 시인은 스윈번에서 보들레르로 바뀌었다.
=나폴리로 무대를 옮긴 것은 내가 실제 자란 곳에서 캐릭터를 만드는 게 더 편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곳은 지중해이지 태평양이나 대서양이 아니다. 나는 앵글로색슨의 문화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각색 과정이 간단하진 않았다. 마우리치오에게나 나에게나 이번 각색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감독이 되기 위해 내가 하는 작업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과정이 무척 어렵고 복잡했다.
-<마틴 에덴>은 잭 런던의 소설 중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은 얼마 전 영화화된 <콜 오브 와일드>의 원작이기도 한 <야성의 부름>이며, 나 역시 그가 원래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러한 의외성이 당신이 이 영화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나.
=왜 미국에서 <야성의 부름>과 같은 작품이 명성을 얻고 <마틴 에덴>은 많이 거론되지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잭 런던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일부러 보지 않고 야성적인 자연주의 소설에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달리 잭 런던은 유럽에서 사회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마틴 에덴> <강철 군화> <어둠의 심원> 같은 작품이 그 예다. 잭 런던은 허버트 스펜서의 개인주의에 매료돼 있었고, 당시 공산주의와는 조금 다른 사상을 지지한 작가다. 그리고 <마틴 에덴>은 지난 세기의 재앙, 파시즘과 나치즘의 도래에 대한 잭 런던의 예언이 됐다.
-마틴 에덴은 지난 세기 예술과 계급 문제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가 동시대에 주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했나.
=마틴 에덴은 햄릿이나 파우스트 같은 원형의 캐릭터다. 그는 부정적 의미의 히어로이자, 개인주의 광신자이며,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위해 싸우며 자신을 위해 죽는다. 노동자계급의 마틴 에덴은 문화를 통해, 책을 통해 독학하며 계급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결국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고 제도와 문화산업의 희생자가 된다. 마틴 에덴의 책이 출판될 때 침몰하는 배를 보여준 것은 그의 끝을 은유한 것이다. 이는 원작 소설을 쓴 잭 런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잭 런던은 현대 문학계가 산업화되며 희생된 작가다. 또한 20세기에 출간된 책이 19세기에 기반을 두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을 예언했다면, 영화 <마틴 에덴>은 20세기에 뿌리를 둔다. 지난 세기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지금 시대에 유효한 현대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20세기 많은 사람들이 노동권을 얻기 위해 투쟁하고 진보를 이뤘지만 지금은 어떤가? 파시즘이 부활하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으며 영국은 브렉시트가 진행됐다.
-당신은 픽션의 요소가 가미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왔다. <마틴 에덴>은 다큐멘터리 요소가 가미된 픽션이다. <마틴 에덴>은 전작과 어떻게 다른가.
=나에게 영화 만들기는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픽션을 만들 때나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나 내가 쓴 영화적 도구에는 차이가 없다. 시네마는 언제나 무언가를 변환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무언가를 변환하게 된다. <마틴 에덴>은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과 다른 작업이 아닌, 집결판과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이자 윤리적 자원봉사주의자, 에리코 말라테스타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리코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많은 사회주의자에게 멘토와 같은 역할을 했다. 사회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의 경계를 담고 있는 영화에서 에리코의 복합적인 이미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마틴 에덴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모두와 갈등한다. 그럼에도 마틴의 멘토였던 루스 브리센든은 그에게 사회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조언한다. 마틴이 스펜서로부터 배운 개인주의가 보수성으로 빠지기보다는 아나키즘에 가까워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마틴 에덴>은 독학자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방법을 터득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재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난 원래 화가였다. (웃음)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사람들은 주변 세상을 관찰하며 그로부터 느낀 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 난 때때로 길거리에서 불확실한 상황을 마주하며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스스로 방식을 터득했다. 이같은 작업 방식은 내가 제작까지 겸한 <마틴 에덴>에도 적용됐다.
-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늑대의 입>이나 <상실과 아름다움>과 같은 전작도 우연성에 기댄 면이 있기 때문에 왠지 시나리오대로 찍지는 않았을 듯한데.
=예전에 작업한 다큐멘터리에는 특정한 대본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300페이지가 넘는 시나리오에서 시작해 조금씩 내용을 덜어내며 신을 바꾸어나갔다. 내가 직접 촬영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배우들과 친근하게 지내며 현장에서 대사와 신을 바꿔나간다. 우리가 가진 기록 영상이 다양했기 때문에 아마 편집실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버전의 <마틴 에덴>도 가능했을 것이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는 영화 매체에서 글쓰기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체득했고, 그렇게 예측하지 못했던 불확실성을 담은 작업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영화산업과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많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틴 에덴>의 제작자이기도 했다. 전작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는데 제작자로서의 어려움은 없었나.
=우리가 가진 제작비로 20세기 초·중반을 배경으로 한 극영화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스톡 푸티지(이전에 촬영되어 현재까지 보관 중인 필름이나 비디오 촬영물.-편집자)의 활용은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영화의 산업화를 반기지 않는다. 마틴 에덴이 문화산업의 희생자였던 것처럼, 그것은 시네마를 망칠 수 있다. 사실 직접 촬영감독이 되어 편집하고 제작까지 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다. 영화 만드는 방식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당신의 영화는 아카이브 영상과 기간이 만료된 스톡 푸티지를 활용해왔다.
=미국 소설을 유럽 배경 영화로 각색했는데, 결국 다른 문화적 토대를 갖고 있지 않나. <마틴 에덴>과 같은 스토리를 구현함에 있어 20세기를 보여주는 데에 한계가 있어 아카이브를 사용한다. 아카이브는 이 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허구의 영상보다 강한 힘을 갖는다. 아카이브 영상을 통해 주인공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는 플래시백을 보여줄 수 있고, 나폴리와 유럽의 당시 시대상을 보여줄 수 있다. 이들은 마틴 자신의 기억이다. 언제나 시네마는 일종의 발명이었다. 어떤 재료로부터 영화라는 결과물을 만드는 발명을 사랑한다. 아카이브 영상을 활용하는 것은 내가 이전 영화에서도 했던 작업 방식이다. 대위법(상관없는 신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적인 편집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필름의 영향을 받은 건가. 어떤 이들은 당신의 영화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읽기도 하는데.
=특정 스타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난 이탈리아영화도 프랑스영화도 러시아영화도 좋아한다. 전세계의 영화를 다 좋아한다. 로베르 브레송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특정 모델을 가져서는 안된다. 자신의 방식으로 시행착오를 겪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준 작품들의 영향을 받으며 나아가야 한다.
-영화 초반에는 이탈리아 팝 음악이 깔리고, 뒤로 갈수록 클래식이 쓰인다.
=마틴 에덴 캐릭터가 변하면서 병렬적으로 배치된 음악 역시 함께 진화한다. 처음의 마틴 에덴은 굉장히 단순하고 순진한 인물이다. 그랬던 인물이 엘레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책을 읽고, 작가가 되고, 그리고 유명해지면서 고급스런 바흐의 클래식으로 음악이 바뀐다.
-한국 비평가 중에는 <마틴 에덴>과 <기생충>을 비교하는 이들도 많다.
=매우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비교해본 적은 없지만 영화 안에는 비슷한 요소가 있다. 둘 다 사회 계급에 대한, 정치와 부에 관한 영화이며, 계급투쟁을 다루고, 그에 대한 상징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아직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 한국 영화제를 한번 가야 할 텐데.
-봉준호 감독의 코멘트 때문에 개봉 전부터 <마틴 에덴>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개봉 후에도 관객 반응이 아주 좋다. 어려운 시국에도 다양성영화 시장에서 꾸준히 관객이 들고 있다.
=꼭 한국에 가야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