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고 기다릴 뿐이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 이사장에 취임한 이용관 이사장은 BIFF에 닥친 온갖 풍랑을 극복하며 25년을 이끌어온 장본인이다. 그런 이용관 이사장에게도 코로나19는 전무후무한 위기로 다가왔다. 2019년부터 밝혀온 여러 가지 비전과 계획은 잠시 보류되고 난관 극복에 총력을 쏟으며 1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21일 BIFF는 25회 개막을 앞두고 있다. 많은 영화제들이 온라인으로 전환하거나 비대면 방식을 택한 데 반해, BIFF는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은 “코로나19 시대의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BIFF의 답이기도 하다. 위기일수록 영화의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BIFF의 의지가 어떤 성과를 거둘까. 올해 BIFF의 성패는 단지 BIFF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 영화, 그리고 영화제의 미래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 될 것이다. 개막을 2주 앞둔 10월 7일, 본래라면 영화제 개막식이 한창일 부산 영화의전당을 찾았다.

-그동안 크고 작은 위기를 극복해왔지만 올해만큼 어려운 해도 없었을 듯하다. 매년 괴롭히던 태풍이 차라리 그리울 지경이다.

=어제 회의를 할 때 ‘내일(10월 7일)이 개막식인데 왜 태풍이 안 오지?’ 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매년 태풍을 피해서 영화제를 여는 게 고민거리였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2주를 연기해 10월 21일 개막한다. 21일에 태풍 오는 거 아니냐는 농담도 하고. 올해는 야외 행사가 전면 취소됐지만 날씨는 중요하다. 매일 아침 뉴스부터 확인하는데 독감과 날씨를 살피다보면 하루가 다 지나간다.

-이것부터 묻겠다. 영화제는 예정대로 진행되는 건가.

=추석이 지난 이후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다. 부산 지역 확진자가 다소 늘었지만 문제는 결국 수도권이다. 2주 단위로 방역 조치가 발표되는데 10월 11일 일요일에 다음 2주 동안의 조치가 결정될 것이다. 일단 우리 입장에서는 어떤 상황이든 대비를 해야 하니 전문가들을 모시고 방역 자문회의를 꾸려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다. 11일에 결정되면 12일에 회의를 하고 이후에 부산시와 협의 후 최종 결정을 한다. 일단 세 가지 시나리오를 모두 준비 중이다. 첫째는 현재 2단계가 유지되는 경우. 이때는 지금 준비한 대로 30명, 50명 이하의 관객을 받아서 상영할 예정이다. 둘째, 방역 단계가 다소 완화되는 경우엔 관객을 상영관의 3분의 1까지 좀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는 최악의 경우엔 아예 개최를 못 할 수도 있다. 사실 개최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어렵다. 12월까진 큰 문제가 없지만 이후 영화제 스탭들의 임금은 사업비로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고용 상태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질 수도 있다. 예산, 결산 문제 등으로 복잡해지겠지만 지금부터 미리 그걸 계산하고 있진 않으려 한다.

-BIFF는 수년간 정치적, 재정적인 면에서 어려움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번만큼 큰 위기도 없었다. 이사장으로 취임 후 새롭게 재정비하던 와중에 일어난 사태라 더욱 안타깝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진인사대천명’이다.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고 나머지는 기다릴 뿐이다. 25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되돌아보면, 매년 크고 작은 문제들을 넘겨가며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도 후회를 남기지 않을 만큼 주어진 일, 할 수 있는 일들에 매진하려 한다. 그것밖에 없다.

-지난 9월 14일에 온라인 기자회견을 통해 개최 연기를 밝혔다. 쉽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해도 의사 결정 과정 전반이 오래 걸린다는 인상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많은 부분이 우리의 결정권 바깥에 있다. 고비마다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 게 종전의 위기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다. 중앙정부의 방역 대책과 규정이 최우선이다. 자문단을 만든 것도 이를 거쳐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최선의 수를 찾아보자는 이유에서다. 만약 영화제 과정에서 확진자가 나왔을 때 이를 추적, 통제할 수 있도록 모든 동선 기록을 CCTV로 남기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올해 BIFF는 개·폐막식은 물론 무대인사, 오픈토크를 비롯한 일체의 야외 행사를 취소하고 오롯이 영화 상영에만 집중한다.

=개최를 취소할 순 있어도 온라인으로 할 수는 없다는 게 우리 입장이다. 여기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8월 초순까지만 해도 오프라인이 가능하겠다는 희망이 있었다. 당시 K-방역에 자신감을 가지고 해외 영화인들을 설득했고 그들 역시 부산을, 그리고 한국을 믿고 출품작을 내주었다. 모든 전제는 오프라인 상영이 조건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세계 여러 국제영화제들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가 BIFF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상황이 바뀌었다고 온라인으로 전환하면 그 영화들 입장에선 갈 곳이 없어진다. 오랜 신뢰와 믿음이 깨지는 거다. 이건 단지 올해의 문제가 아니라 내년 이후로 이어지는 BIFF의 위상과 관련된 부분이다. 신뢰를 쌓긴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영화와 관객이 만날 수 있다는, 영화인들의 희망이 되어주어야 할 상징적인 부분도 있다. 이번에 놀란 것 중 하나가 한편당 30~50명이 채 되지 않는 관객을 만날 수밖에 없는데도 관객과의 대화(GV)를 위해 거의 모든 영화 관계자들이 흔쾌히 내려온다고 답을 주었다는 점이다. 지금 그만큼 관객과의 만남에 목이 말라 있다.

-얼마 전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오프라인에서 대면으로 무사히 치러지기도 했다.

=굉장한 일이다. 희망을 안겨주었다. 사실 이제까지 극장을 통해 코로나19가 전면 확산된 사례는 없지 않나. 베니스에서 배우들도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행사를 소화한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공공예술을 하는 공간은 이제 나름의 방역 모델이 잘 갖춰지고 있다. 토론토는 마켓이 중요한데 규모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음에도 충분히 유의미한 성과를 남기며 영화제를 마쳤다. 한국은 세계의 기준이 될 정도의 방역 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못할 이유가 없다. 지역 주민들이나 지자체에서 여전히 걱정이 많은데 베니스나 토론토가 선례를 남겨주어 힘이 된다.

-상영관을 영화의전당 5개관에 한정함에 따라 상영 영화도 68개국 192편으로 대폭 축소됐다. 그럼에도 베니스나 토론토보다 월등히 많은 편이다.

=오프라인으로 개최한다는 걸 전제로 최대한 많은 영화를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역산해서 나온 숫자다. BIFF의 경우 여타 영화제들과 다른 점은 전용관이 있다는 거다. 토론토가 75편 남짓한 영화로 치러진 건 물리적인 인프라가 우리보다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산은 영화의전당이라는 큰 자산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200편 가까운 영화를 상영하는 건 놀라운 결과다. 프로그래머들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전주, 부천 등 앞선 국제영화제들이 온라인을 병행하거나 최대한 활용했다. 올해 하반기에 열리는 만큼 앞선 영화제들의 사례를 보고 여러 가지로 방법을 강구했을 텐데.

=온라인을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건 아니다. 관객과의 만남은 다양한 형태로 강구해볼 수 있다. 가령 이번에 타이영화 중 한편은 타이에서 한국과 동시에 상영하면서 온라인으로 GV를 준비 중이다. 한국문화원을 활용할 수도 있다. 해외에 있는 관객 중 부산을 찾아오고 싶지만 그럴 여건이 안되는 분들을 문화원 같은 공공의 공간을 매개로 만날수도 있다. CGV의 해외 극장을 이용할 수도 있고 넷플릭스, 웨이브 등 OTT와의 연계도 가능하다. 다만 기본은 명확하다. 영화제는 모여야 하고 함께 봐야 하고 참여해야 한다. 온라인을 동원해 반쪽짜리로 한해를 어떻게든 넘기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이사장 취임 당시 새로운 형태의 축제에 대한 포부를 전했다.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의 영화 상영 문제부터 토털 마켓을 통한 플랫폼 구축 등 여러 가지 비전을 밝힌 바 있다. 현재 시점에서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디지털 시대에 대한 고민은 2000년 초부터 시작됐다. 예를 들면 칸국제영화제가 마켓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대한 다양한 방안들이 있었다. 사실 온라인 전환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단순하게는 상영작의 코딩 문제부터 저작권 협의 등 처리해야 할 부분이 많다. 한국의 경우 저작권 보호에 대한 인식이 뒤늦게 자리 잡기 시작한 만큼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OTT 시대를 대비해야 하기에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고민 중이었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로 쉽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사태를 맞이하면서 싫든 좋든 그런 방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핵심은 여전히 영화관, 그리고 영화의전당이다. 그 뿌리와 기준을 잊지 않고 여러 가지 실험과 도전이 필요해졌다. 한편으론 공공기관과 지자체를 설득하는 게 용이해진 면도 있다. 본래 관료 집단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부산시만 해도 스마트 시티를 비롯해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좀더 솔직하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영화제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기본적으로 지역 영화제는 지역 관광산업과 연계된 행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그 근본적인 결속이 깨졌다. 이제 영화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른 필요와 쓸모를 제시해야 할 때 가 왔다.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코로나19로 BIFF와 관련된 예산을 쓰지 않으면 그걸 다시 국고로 반납할 것인가. 풍선 효과처럼 한 군데의 쓰임이 줄어든다면 그만큼 다른 형태로 쓰임이 늘어나는데, 관료 사회는 이런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다고 따로 갈 순 없으니 인내심을 갖고 설득하는 길밖에 없다. 디지털 혁명부터 4차산업의 성장까지, 세계가 바뀌고 있다. 노동의 형태가 바뀌고 삶의 질이 전환되는 시기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것이 문화예술 분야다. 25년간 다져온 BIFF의 인지도와 부산 시민들의 자부심, 성숙한 시민의식을 믿는다. BIFF는 전세계를 향한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매번 지자체나 지역 정치인들과 충돌하는 이유는, 영화제가 지역 산업과 경제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거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제가 산업을 책임지는 도구는 아니다. 세계인의 이목을 모으는 플랫폼이자 자긍심을 심어주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그런 역할들이 더욱 선명해졌다고 본다. BIFF는 부산의 재산이기도 하지만 초국가적인 매개체가 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올해는 만남의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의미는 더욱 깊어졌다. 올해 영화제가 무사히 치러진다면 플랫폼으로서 BIFF의 가치와 위상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BIFF의 정체성 역시 새롭게 질문을 받고 있다. 고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있을 땐 아시아영화의 허브로서 신진 작가들의 발굴에 힘썼다면 최근 칸, 베니스, 베를린, 토론토 등 세계 유수 영화제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으는 쪽에 더 힘쓰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이유가 있다. 과거엔 아시아의 작가영화들이 많이 활성화되었지만 최근엔 베트남을 비롯해 여러 국가의 영화들이 빠르게 상업화되는 중이라 작품 수급에 어려움이 있다. 일본영화는 위기에 봉착했고, 중국의 검열은 더욱 엄격해졌다. 물론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공백이 적지 않다. 아시아는 변해가는데 우리가 그에 맞춰 따라가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영화제의 색깔을 다시 찾아가는 중이라고 봐주면 좋겠다. 환자로 치자면 수술 후 회복 단계였다. 다행히 새롭게 바뀐 프로그래머들이 남동철 수석 프로그래머를 중심으로 손발을 맞춰 팀워크를 발휘하는 중이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프로그래머들을 비롯한 실무진뿐만은 아니라고 들었다. 취임 당시부터 이사회 중심의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다이빙벨> 이후 정치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이사장 중심의 비상 체계가 꾸려졌다. 그걸 다시 정상화하는 과정에 있다. 내년 2월을 목표로 태스크포스를 꾸려서 정관 개정을 논의 중이다. 사실 영화제는 집행위원회 체계로 가야 한다. 전양준 집행위워장과도 애초부터 합의가 된 사안이다. 이사회는 일종의 원로회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는 것이 맞다. 이번에 이사진의 임기가 다 되어 이사들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일일이 설득을 했다. 내년에는 정관 개정과 함께 정상화될 것이다. 위기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소방수로 등판한 셈이니 가능한 한 빨리 물러나서 서포트를 하고싶다.

-이제 영화제 개막이 코앞이다. 그동안 다사다난했던 시간들을 소회한다면.

=영화제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니 섣부른 말은 금물이다. 그럼에도 올해의 파도들을 되돌아 본다면 ‘방황’,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매주 상황이 바뀌고 그에 따라 입장도 바뀌는 시간이었다. 돈이 없으면 돈을 걱정하면 됐고, 정치적인 문제가 있으면 맞서서 투쟁할 수 있었지만 코로나19 앞에서는 답이 없었다. 그래도 지난 25년간 한솥밥을 먹은 경험들이 있어서 상황이 바뀔 때마다 충분히 대화하고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방황하는 와중에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해준 감독, 제작자, 영화인들 모두에게 감사를 전한다. 특히 바쁜 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혀준 한국 영화인들, 이렇게까지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건 BIFF를 하는 이유이자 보람이다. 코로나19로 관객과 시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국가 시책에 따라서 최소한의 안전한 만남을 준비 중이니 부디 BIFF를 응원하고 즐겨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