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부터 창작물까지 불안과 공포를 독자나 관객이 경험하게 하려고 꼼꼼하게 보여주는 세상에서 강화길 작가는 반대의 길을 간다. 일인칭 시점에서 목소리를 듣게 되는 화자는 현재 상황만큼이나 과거의 경험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데, 그 불안이 무척 타당하다는 사실을 여성 독자라면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으리라. 집집마다 대대로 여자들만 공유하는 이야기, 아들에게는 비밀로 해온 이야기는 또 어떤가. 아는 것은 힘이라지만, 여자들만 아는 많은 세상의 진실은 힘이 되는 대신 짐이 되곤 했다. 소설가 강화길의 <화이트 호스>는 기억과 불안의 상관관계를 경험하게 하는 <음복>과 <가원>을 비롯해 소설가와 유령의 고딕 멜로드라마 <화이트 호스> 등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이상하게도, 분열하는 순간들에서 웃음이 튀어나올 때도 있고, 기어코 행동하거나 끝내 침묵하게 될 때도 있다. 그 결과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다른 사람>, 소설집 <괜찮은 사람>에 이어 세 번째 책 <화이트 호스>를 펴낸 소설가 강화길을 만났다.
-글을 쓰는 것과 글을 파는 것 사이에는 갈등과 긴장이 있다. 강화길 작가에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어떤 일인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기쁨은 쓸 때에 있다. 쓰는 순간에는 나 자신에게 밀착되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책을 내고 나면 깨닫는다. 쓰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판매에 대한 스트레스도 당연히 있고, 소설을 쓰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도 책을 내면 느끼게 된다. 힘들다기보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이 직업을 가진 어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다. 책을 내고 나면 알게 된다. 그 런데 어쩜 이렇게 학습능력이 없는지.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이라는 <음복> 후반부의 문장은 최근 몇년 한국에서, 한국 문화계에서 있었던 많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모를 수 있는 것도 권력’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이 소설만큼 잘 보여주는 예가 또 있을까.
=처음부터 알고 썼다기보다는 쓰다가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집마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는 데서 시작했다. 오빠나 남동생은 모르는, 여자 식구들만 아는 이야기들. 그게 소설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쓰기 시작했는데 소설을 쓰다가 알게되었다. 누가 모르게 하는 것인지.
-<음복>은 이상적인 남자의 함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나의 남편 정우는 집안일을 당연히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나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들어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그 집에 가 보니 내가 좋아하는 그 남자의 모습이 만들어진 데에는 내가 겪었던 알게 됨의 노동을 하는 사람이 존재하더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가 다 알게 되면 자기와 비슷해지잖나. 그게 싫은 것이다. 세나의 마음을 나 역시 쓰면서 알게 되었다.
-<가원>에서 “하지만, 왜, 어째서,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이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일일까. 왜 나는 항상 이 여자 때문에 미칠 것 같은가”라는 말이 나올 때, 남성이 편리하게 빠져나간 자리에서 사적이든 공적이든 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들끼리 갈등하는 양상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가원>은 내가 쓴 소설 중 가장 사랑이 넘치지만 가장 비정한 이야기다. <음복>에서 정원의 비중을 낮추다 보니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 아쉬움이 <가원>의 연정에 많이 녹아 있다. <가원>은 내부자의 입장이다. 내부자의 입장에서 조부모를 보는. 누구는 자기이름을 버리는 것으로 살았고, 누구는 자기 이름으로 살았다. 연정은 그걸 다 알지만, 할머니와의 관계가 보통 애증의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는 할머니를 볼 수 없다. 그런 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화이트 호스>에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소설집 <괜찮은 사람>에서도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여럿 등장한다. 불안을 가중시키는 장르적 장치인데.
=나는 소설을 처음 쓸 때부터 일인칭 화자를 좋아했다. 일인칭 시점으로 쓸 때의 장점이자 단점이 사각지대다. 주인공 본인만 아는 게 있고 어떤 것은 절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주인공과 독자 사이의 내적 친밀감이 높아진다. 주인공이 불안을 느끼는 순간에도 상대를 믿는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아닐 거야’라고 생각할 때, 순간적인 공포가 올라왔다 사라지는 경험. 나는 사건의 진위보다 이 사람의 불안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왜 공포를 느끼는지를 일인칭 시점으로 독자와 밀착시킨 상태로 독자의 마음에서 불안이 부풀어오르게 하고 싶었다.
-소설에서 욕설이나 폭력을 다루는 원칙이 있나.
=내 소설에서 폭력이 중요한 주제라는 건 알고 있지만 폭력적인 장면을 쓰지는 않는다. 내 소설의 화자들은 대부분 여성인데, 여성들은 일상의 폭력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걸 소설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강간’, ‘쓰러져 있다’, ‘눈을 감았다’ , 이런 표현들이 충분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이 단어들이면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화이트 호스>의 주인공은 소설가다. 내용 중 “내가 열심히 쓴 작품을 다른 사람들도 소중하게 여겨주면 좋겠지만 세상살이가 뭐 그렇게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하면서 출간 전 마음의 준비를 하다가, “정말로 모든 것은 내 예상과 달랐다. 사람들은 내 소설을 지나치게좋아했다”는 식의 유머가 좋다. 무서운 일이 아니라 이상한 일을 겪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래서 <화이트 호스>는 가장 쓰기 어려운 소설이기도 했다. 비평에 위축되지 않으려고 마음먹지만 쉽지 않더라. 내 소설은 텍스트지만 나는 텍스트가 아니다. 신인 작가시절, 나 자신조차 도구나 텍스트처럼 읽히는 듯한, 내 소설이 나의 연장선에서 해석되는 인상을 받았을 때 고민을 많이 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온갖 평판에 시달린 연예인이다. 노래 가사를 보며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유머 감각을 빌려오고 싶었다. 많이 고쳐가면서 알았다.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이 내게 필요했구나, 비평은 비평이고 내 소설은 내 소설이구나. 의미를 바꾸는 것은 쓰고 있고 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소설 쓰기만의 문제는 아니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평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남들이 나를 규정하는 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머리로는 알지만 잘 안된다. 소설을 쓰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화이트 호스>를 쓰고 나니까 소설 쓰기가 더 좋아졌다. 그 뒤에 <오물자의 출현>이나 <음복>을 쓸 수 있었다. 일인칭 화자에게 너무 밀착되어 있을 때 삐끗하면 자기연민이 되는데 사람들이 자기 연민을 읽고 싶어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때 필요한 게 유머감각이라고 생각했다. <화이트 호스>는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 중 유일하게 나 자신을 위해 쓴 소설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평생 쓰는 작가가 있고, 또 시대의 관심사를 따라가는 작가가 있다.
=그걸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쪽에 가깝다. 알아가는 사람. 내 화자들은 뭘 모르기 때문에 동시에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애매한 위치에 있고 혼란을 겪는다. 그 사람들이 가장 친밀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겪는 고통에 관심이 많다. 가족, 애인, 친구. 가장 친밀하기 때문에 더 많이 기대하고 더 많이 실망하는 관계. 그 경험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친밀함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지금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작가가 자신의 관심사를 다 알고 작가가 된다고 생각했다. 첫 책을 냈을 때, 내가 모른다는 데 놀랐다. 8년쯤 글을 쓰고 나니 내가 친밀한 관계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았고, 사랑이 있기 때문에 더 힘든 마음들을 써온 것 같다는 걸 늘어놓고 나서야 알게 된 듯하다. 이걸 구체화해나가는 게 나의 숙제겠지.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고 또한 알고 있어서 상시적으로 불안에 시달리는 상태를 묘사하는 강화길 작가의 표현이 좋다. 작가 개인은 그런 불안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나는 불안증이 엄청 심하다. 내가 불안한 사람이니까 나에게서 무언가를 떼어내 인물을 만들었을 때 그게 크게 나타나는 거잖나. 불안이 이렇게 큰 사람이 왜 이런 직업을 선택했지? (웃음) 동료 작가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냥,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고, 그래도 그 이후에도 삶은 있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화이트 호스> 같은 작품을 또 쓰지 않을까?
-귀신도 나오고.
=귀신 들린 집 이야기가 좋다. 기억이기 때문에. 귀신들은 다 기억이다. 과거의 망령들이고. 불안증도 쓸쓸하고 누추한 삶을 위로해주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고딕소설을 좋아한다.
소설집 <화이트 호스>
소설가 강화길은 <씨네21>에 연재하는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칼럼의 첫글을 테일러 스위프트와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미스 아메리카나>에 대해 썼다. 1252호에 실린 ‘나의 틴에이지 소녀’라는 제목의 그 칼럼은 소설집 <화이트 호스>의 표제작, 그리고 권말에 실린 ‘작가의 말’ 까지 ‘테일러 스위프트와 평판에 대한 강화길 3부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가족 외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야기가 <음복>이라면, 내부자의 시선으로(작가의 말을 빌리면 <음복>에 나오는 고모 딸 정원의 시선) 본 이야기가 <가원>이 되니 나란히 읽어도 좋겠다. <화이트 호스>는 평판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읽었을 때 <오물자의 출현>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고, 고딕소설이라는 측면에서 <손>과 연결된다. 독자를 택시 안에서 꼼짝 않고 붙들어두는 <서우>와 여성간의 유대를 생각하게 하는 <카밀라>까지 읽고 나면, 강화길이 장편으로 개작해 내년 발표 예정이라는 고딕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을 몹시 기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