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지역사회에서 명망을 쌓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곁에 있는 삶. 완벽하다고 여겼던 세계가 완벽한 기만이었음을 알게 된 지선우(김희애)는 외도한 남편 이태오(박해준)의 가슴에 의료용 가위를 꽂는다. 선우의 상상 속에서다.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며 선우가 느끼는 환멸에 공감하는 한편, 완벽함의 기준에 의문이 생겼다. 비에 젖은 양말을 현관에서 벗기 귀찮아 거실에 발도장을 찍고 다니는 남자. 조리 중인 갈비찜을 꺼내 쩝쩝거리며 뜯어먹더니 식탁에 흘린 양념 국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손가락만 춥춥 빨아대는 태오가 외도하기 전엔 괜찮았단 말이야?
원작의 남편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 에서 방영한 <닥터 포스터>를 같이 보았다. 무능하긴 매한가지. 저쪽은 그래도 가사 노동과 아들 양육에 참여한다. 집을 나가라고 트렁크를 싸놨더니 만취해 기어들어온 태오가 ‘꿀물’을 달라고 했던 장면이 원작에선 그냥 ‘물’이다. 느릿한 좀비도 이 땅에 이식하면 빨리 뛰듯이, 배우자를 기만하는 남편도 한국식으로 파렴치해졌을까? 둘 중 누가 나은지 견줘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좀 나으면 어쩔 건데!
선우를 비롯해 배우자의 가치를 올릴/올린 사람은 자신뿐이라 믿었던 여성들의 말이 귀에 날카롭게 박힌다. 바텐더 민현서(심은우)는 데이트폭력 가해자를 두고 “그렇게 나쁜 앤 아니에요. 내가 꼭 괜찮은 남자로 만들 거”라 했고, 남편에게 성병이 옮아 병원을 찾았던 환자(서이숙)는 “이혼으로 지난 세월 동안 쏟아부은 내 정성을 허공에 날리기 싫”다 했다. ‘남자의 본성은 동물’이라는 언설을 동원해 자기방어와 상대 여성을 공격하는 도구로 삼을 때, 남자는 문제에서 열외로 빠지고 인간 이하보다 아래로 떨어지는 비참함은 여성끼리 뒤집어쓰게 된다. 구제 불능의 남자가 거짓을 더할 때마다 차오르는 환멸에는 선우 자신이 어떤 수고와 헌신으로 완벽을 유지했는지,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라고 스스로 속였던 것도 포함될 테다.
VIEWPOINT
사건의 전조
거실에 잘 걸려 있던 결혼사진이 별안간 뚝 떨어져 유리에 금이 가면, 그 시각 배우자는낯선 상대와 숙박업소에서 뒹군다. 다정한 부부, 행복한 가족사진은 복선이라 말하기도 새삼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파국의 기호다. <부부의 세계>도 시작부터 지선우, 이태오 부부의 리마인드 웨딩사진을 벽에 걸었다. 원작인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에서는 제마 포스터(서랜 존스)의 진료실 책상에 보라색 액자의 가족사진이 놓였다. 줄곧 파란색 계열 옷을 입던 제마는 남편의 비밀과 거짓말을 폭로하는 날, 보라색 드레스를 차려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