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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거짓말을 해줘
2002-05-08

조선희의 이창

밀란 쿤데라의 <생은 다른 곳에>라는 소설에는 다소 복잡한 사생활을 즐기는, 몰락한 부르주아 여성이 나온다. 무능한 남편에 대해 환멸의 기억만 간직하고 있는 이 여성은 전선에 나간 남편이 게슈타포에 체포됐으며 집단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남편의 영광스런 순교는 그녀에게 자부심을 안겨주고 그녀는 불행했던 결혼생활과는 비교가 안 되는 품위있는 미망인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나중에 남편이 유대인 여자와 밀회를 즐기다가 엉겁결에 변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 여인은 자부심이 산산조각나고 심히 불행해진다. 이제부터는, 그 사실을 아는 엄마와 모르는 아들, 모르는 주위 사람들 사이에 영원한 긴장관계가 만들어진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가령, 여기, 한 행복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만족스런 부부생활을 하고 있고 물질적으로도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남편은 소문난 바람둥이고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오직 이 여자뿐이다. 그렇다고 할 때, 내가 그의 친구라면, 어떻게 할까. 그냥 한 세상 행복하게 살다가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나. 여자가 남편 얘기를 할 때 “그래, 그는 좋은 사람 같구나” 하고 거짓말하면서? 아니면 “정신 차려, 이 친구야”라고 해야 하나. 여자가 거짓과 위선의 인생을 마감하고 진실을 재료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도록 도와야 하나.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진실과 행복을 양자택일하라면 나는 어느 쪽을 택할까. 물론, 군인이 총 들고 청와대를 접수했는데 ‘반만년의 성군 나셨네’라는 소문을 믿고 ‘이번 성군이 붕어하실 때까지는 태평성대겠구나’ 하고 행복해 한다면 그건 역사적이고 형사적인 범죄행위다. 그런 것 말고, 이런 민사적이고 멜로적인 영역에 국한시켜서 이야기해보자.

아마도 이 문제를 가지고 ‘골든 벨을 울려라’고 하면 진실이라는 정답보다는 행복이라는 정답쪽에 훨씬 줄이 길어질 것이다. 그게 대중의 선택이라면, 그걸 잘 알고 있는 게 상업영화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이를테면 휴머니즘영화인데, 여기서 휴머니즘적인 감동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이 마지막의 노벨상 시상식 장면이다. 평생 정신분열로 고생해온 천재 수학자 내시는 노벨상 시상식의 연단에서 객석의 아내에게 눈을 맞추면서 “이건 당신 거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감동의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면 냉혈한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싸다. 평생 제대로 된 직장 한번 가져보지 못하고 정신병원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고 갓난아이를 목욕물에 빠뜨릴 뻔한 그런 남편 곁에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면 그런 여인은 노벨 경제학상뿐 아니라 노벨 평화상도 받을 자격이 있다. 나라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 참 대단한 여자구나.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존 내시 전기를 읽은 친구로부터 썰렁한 얘길 들었다. 수상자 선정을 둘러싼 잡음 때문에 시상식이 몇 시간 지연됐고 내시도 감동의 연설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도 어찌어찌 같이 살긴 하지만 일찍이 법적으로 이혼상태였다는 것이다.

<허리케인 카터>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흑인 권투선수 루빈 카터는 살인혐의로 종신형을 살고 있는데 이 영화에도 비슷하게 감동적인 신이 있었다. 카터는 면회 온 아내에게 슬픈 눈빛으로 “이혼해줘”라고 말했고 아내는 돌아서며 키스의 손짓을 보낸다. 정말 멋있는 커플이었다. 남자는 자기 때문에 한창 좋은 나이에 ‘수절’하고 있는 아내를 해방시키는 성명을 낭독한 것이고 아내는 ‘당신의 뜻이라면’ 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떠나가는 것이다. 아마 이 신에서 나도 코끝이 찡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실존인물 카터의 아내는 일찌감치 떠나버렸고 따라서 감옥에서의 애달픈 이별은 없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뷰티풀 마인드> 감독이 절대 무리한 건 아니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아니라 극영화 감독이기 때문이다. 또한 코언 같은 뉴욕파가 아니라 할리우드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동의 러브스토리로 영예의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도 챙기고 국내외 시장에서 달러도 긁어모을 수 있었다.

가령, 아까 그 행복한 여자가 지금도 옆에 있다 하자. 나는 그런 일급비밀을 죽을 때까지 지켜줄 만큼 입이 무거운 사람은 절대 아니다. 정의감과 의협심이 부쩍 동한 어느 날, 나는 폭로한다. “그 남자, 사기꾼이야. 부인이 셋이고 만날 해외출장 간다고 가방 싸들고 나가서는 서울에 있었다구.”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래서 어쨌다구?” “좋은 남자인 것 같다는 말, 거짓말이었어. 나는 벌써부터 다 알고 있었어. 내가 거짓말을 한 거라구.” “그게 뭐가 어때서? 내가 진실을 알면? 돈도 잃고 사랑도 잃잖아. 앞으로도 내게 거짓말을 해줘!” 뜻밖의 반응에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소리가 튀어나온다. “에이, 이 할리우드 같은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