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호러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버나드 로즈의 <페이퍼하우스>(출시제는 <종이로 만든 집>이었던 모양입니다)를
꼽는 걸 좋아합니다. 정말로 가장 인상적인 호러영화였냐고요? 모르겠군요. 어떻게 개인적인 감흥을 하나하나 숫자로 매겨 일괄 정리할 수 있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캐치원에서 우연히 이 영화를 접했을 때 받았던 인상이 아주 강렬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인상적인 호러영화로 뽑는 이유는 이 작품이 아주 예외적인 영화여서 질문한 사람의 반응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원작과 주연배우들,
내용만 본다면 <페이퍼하우스>는 호러영화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은 캐서린 스토가 쓴 <마리안의 꿈>이라는 동화입니다. 마리안이라는
소녀가 병을 앓는 동안 침대에 누워 집 그림을 낙서하기 시작하는데, 서서히 그러다 자기가 낙서한 그림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자기가 그린
집 안에 사는 소년과 친구가 된다는 것이지요. 주인공의 이름이 달라졌고 몇몇 설정과 결말도 바뀌었지만 기본 설정은 같습니다. 주인공은 여전히
두명의 병약한 어린아이들이고 사건의 절반은 아이가 종이 위에 투박하게 그린 환상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페이퍼하우스>는 여전히 근사한 호러영화입니다. 제대로 된 폭력 행위는 거의 없고 살인 하나 일어나지 않는 영화지만 로즈의 좀더
잘 알려진 호러인 <캔디맨>보다 훨씬 소름끼치고요. 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결코 어린이영화가 아니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영화는 원작 <마리안의
꿈>에서 갈라집니다.
로즈가 이 영화에서 호러의 분위기를 창출해내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음산한 시각적 인상입니다. 어린아이가 색연필로 그린 그림이 되살아난 세계이므로
이 영화의 환상 세계는 단순하고 정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영화의 주무대인 ‘페이퍼하우스’는 네모난 벽에 네모난 창문이 뻥뻥 뚫린 상자
같은 집입니다. 그 집은 당연히 줄로 쭉 그은 듯한 밋밋한 언덕 위에 서 있고요. 이런 비정상적인 청결함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극히 낯설기 때문에, 관객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주는 불편한 느낌은 바로 이 그림이 주인공 안나의 작품이라는 데서 왔던 듯합니다. 결국 안나는 자기 자신의 꿈을 창조하고
그곳에 방문하는 셈이지요. 결국 이 모든 세계가 안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안나는 꿈속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마주 보는 셈입니다. 여기서부터
정신분석 장난을 칠 여유가 생기기도 하죠. 그 덕택에 막판의 진짜 장르적 호러 장면이 핑계를 부여받기도 하고요. 그림 속의 눈먼 아버지가
미치광이 살인자처럼 도끼를 휘두르며 안나와 소년을 뒤쫓는 장면 말입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다보니 <페이퍼하우스>를 제가 좋아하는 진짜 이유가 떠올랐습니다. <페이퍼하우스>는 공포라는 것이 꼭 육체적 고통과 그에
대한 두려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저에게 알려주는 몇 안 되는 호러영화입니다. 장르 규칙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신선할 정도로 섬뜩한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저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답니다. 식칼 든 연쇄살인마에 매달리기엔 호러영화의 미개척지가 아직도 넓습니다.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