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3사와 옥수수의 통합 OTT 플랫폼 ‘웨이브’가 9월 16일 출범했다. 사진 지상파3사.
지상파 3사와 옥수수의 통합 OTT 플랫폼 ‘웨이브’가 9월 16일 출범했다. CJ E&M과 JTBC도 합작법인 출범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내년 디즈니+가 국내 진출을 예고했다. 한국 진출 초기에는 마니아 중심으로 소비됐던 넷플릭스도 올해 가입자 수 180만명을 돌파했다.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채널이 많아짐에 따라 이전과 같은 제작 방식을 답습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이상윤 쇼박스 투자제작본부장은 “관객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흥행에 참패하는 영화가 많아졌다”고 언급했다. TV 드라마 <추노>가 영화 현장에서 쓰이던 레드원 카메라를 도입한 것이 무려 10여년 전 일이고, 올해 초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은 회당 제작비 20억원을 투자받았다. 예전에는 극장에서만 볼 수 있었던 퀄리티의 작품을 안방TV 내지는 스마트폰으로 쉽게 볼 수 있게 되면서 관객의 안목은 더욱 깐깐해졌다. 물론 이는 창작자 입장에서 기회가 될 수 있다.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는 “예전에는 극장 개봉 자체에 사활을 걸었지만,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 2시간 분량의 영화로 풀리지 않아 포기했던 아이템이 많았는데, 플랫폼이 다양화되면서 드라마로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콘텐츠 제작자들에게는 중요한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플랫폼의 다양화는 결국 무한 경쟁의 시작을 의미한다. 성공하면 꽃길이 열리겠지만, 실패하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함께 언급했다.
투자·배급사도 새롭고 재밌는 걸 필요로 한다
동시에 대두되는 것은 OTT 플랫폼의 성장이 영화계의 안일함을 방증한다는 비판이다. 대기업 투자·배급사 중심의 영화 제작이 창의성을 해쳐왔다는 지적이 특히 거세다. 최근 <연합뉴스>는 “다시 고개 드는 한국영화 위기론… ‘볼만한 영화가 없다’”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비슷한 한국영화가 양산되는 것은 투자·제작·배급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언급했다. 현업에 있는 영화인들은 업계에 문제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투자 실무 책임자들의 생각 이전에 독과점 문제가 크다. 관객이 박스오피스 1~2위에 집중되는 구조에서는 안전한 기획만을 추구하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공정한 게임을 하기 어려운 유통·배급 환경, 빠르게 반응하는 소비 환경의 변화가 서로 맞물리며 지금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산업 내에서 수치가 주는 착시효과가 창작자들을 위축시켜 차별화된 기획이 나오기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 김동현 메리크리스마스 본부장 역시 “극장이 수익 극대화를 위해 흥행할 영화에만 스크린을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는 다양한 콘텐츠가 살아남을 수 없다”며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꼽았다. “대기업 투자·배급사들이 보수적인 기획을 하기 때문에 새로운 영화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는 강혜정 대표의 말은 제작자 스스로가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투자·배급사들도 분명 새롭고 재미있는 걸 필요로 한다. 그런데 투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보수적인 기획보다 더 재미있는 아이템이 없다면 그냥 기존에 하던 패턴을 선택한 것이라는 게 개인적인 해석이다.” <엑시트>는 여름 성수기에 개봉하기에는 배우 라인업이 약하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941만 관객을 동원한 성공 사례로 꼽힌다.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 프로듀서 라인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진 것이 주효했다. 보수적인 시각으로는 약할 수 있는 캐스팅 라인업이 먹힐 수 있었던 데에는, 시대의 변화와 관객 트렌드를 놓치지 않게끔 돕는 ‘집단 지성’의 미덕이 분명 큰 몫을 했다. 강혜정 대표는 <엑시트>가 “감독과 스탭들, 제작사가 의견을 모아 팀업으로 만든 사례”라면, 어떤 작품은 창작자 고유의 크리에이티브를 보호하며 개발해야 한다는 점을 부연했다. 검증된 배우만을 쓰느라 영화에서 보는 얼굴이 한정돼 있다는 지적에 대해 강혜정 대표는 “새로운 배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야한다”는 입장이다. “영화산업은 스타 시스템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스타 중심 영화로 관람을 기대하고 캐스팅하는 사이클이 보통 무난하다. 그런데 무난한 것은 지루해지기 쉽다. 어떤 명분을 갖고 캐스팅을 할 수는 없고, 예산 측면에서 투자자와 캐스팅을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외유내강의 경우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인질>에서 황정민을 제외한 배우를 모두 뮤지컬·연극에서 주로 활동했던 신인배우들로 꾸렸다.
OTT 플랫폼을 겨냥한 영화 제작도?
OTT 플랫폼의 등장이 ‘극장 영화’의 위기를 가져온다면, 그 이유는 단순한 관객수 감소에 있지 않다는 김동현 본부장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지금 극장에서는 박스오피스 1~2위를 하는 영화만 살아남는다. 그렇게 블록버스터급 영화만 남고, 그외 장르영화는 미리 OTT 시장에 맞게 체질 변화를 할 수 있다.” 특히나 지금처럼 홀드백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개봉 3주 후 IPTV에서 영화를 만나는 경우가 허다한 구조에서는 1차 윈도인 ‘극장’에 집착할 이유가 흐려진다. “다양한 윈도가 균등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투자·배급사와 극장이 문제의식을 갖고 체질 개선에 대해 면밀히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TT 플랫폼의 등장이 한국영화계에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견도 다수 있었다. 이상윤 본부장은 “관객이 돈을 내고 볼만한 영화를 만들기 위한 경쟁 구도를 만들어 퀄리티 상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OTT 플랫폼을 겨냥한 영화 제작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가령 지금은 극장에서 시작해 IPTV 등 여러 부가판권으로 영화가 풀리는 시스템이 주가 되지만, OTT에서 20분 분량의 8부작 웹드라마를 먼저 공개한 후 2시간 내외 분량의 영화로 재편집해 극장 개봉을 하는 사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윈도의 선후 관계를 바꾸는 등 유연성을 갖고 접근하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는 한편, 극장측은 “4DX, 스크린X 등 특별관 상영으로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강조하는 것”(조성진 CJ CGV 전략지원담당)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심재명 대표 역시 종편 드라마가 오히려 지상파 드라마보다 좋은 평가를 얻으면서 전세가 역전된 것을 언급하며, “미디어 환경이 바뀌면서 그것이 거꾸로 좋은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영화인들에게 ‘하기 나름’인 까다로운 숙제가 내려졌다. 그리고 이것은 개별 주체의 역량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협동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