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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둥지
2002-05-02

김훈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일산에 살고 있는 나는, 저녁이면 일몰의 강화쪽 하늘로 사라지는 여객기들을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노을진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종적을 감추는 여객기들은 이 세계의 대륙간 하늘을 횡단하는, 힘센 물고기들처럼 보였다. 여객기들은 문명한 대도시들 사이의 전령으로서 아름다워 보였고, 알 수 없는 먼곳을 향한 충동으로 일상의 진부함을 헝클어놓곤 했다.

중국 여객기가 추락한 김해 돗대산의 현장에는 삶과 죽음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었다. 나는 죽음과 구별될 수 없는 일상의 삶에 대해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댈 수가 없었다. 어떠한 관찰자도 그 운명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었다. 그날, 밤새도록 장대비가 내렸다. 불에 탄 토막 시신들은 다시 비에 젖었다. 구조대원들은 조각난 시신이 물에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배수로를 파고 모래가마니를 쌓았다. 산자와 죽은자가 똑같이 가엾었다. 아침까지 비가 쏟아졌다.

사흘 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비행기가 떨어진 김해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비행기가 이륙했을 때, 사고현장인 신어산 일대가 내려다보였다. 산은 눈부신 신록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등판에 돋는 소름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비는 그치고 신록의 가로수들은 봄빛에 빛났다. 광화문 동십자각쪽 담장가 높은 가로수 꼭대기에 까치둥지 세개가 매달려 있었다. 지난해 여름에 까치가 살고 있었는데, 겨우내 보이지 않아서 둥지를 버리고 딴곳으로 갔겠거니 했다. 아침 출근길에 버스 안에서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 보니까 까치들은 여전히 그 둥지 주변에서 짖어대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낡은 둥지를 고치고 있었다. 비 갠 날의 눈부신 나무 꼭대기에서, 제 입으로 물어온 건축자재로 제 집을 짓는 까치는 여객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는 인간보다 복받은 존재처럼 보였다.

며칠 전의 폭우 속에서 김해의 여객기 추락 현장은 구조대원이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죽이 되어버렸지만, 광화문 가로수 꼭대기의 그 엉성한 까치둥지는 떨어지지 않고, 아침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면 건물이 무너지고 저수지 둑방이 터지는데, 까치둥지는 무슨 공법으로 지었기에 그 높은 꼭대기에 끄떡없이 매달려 있는 것인가. 나는 물론 그 대답을 모른다. 조류학 책을 뒤져보니까, 새들의 둥지는 헐겁고 엉성하고 가벼워서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나무와 함께 흔들리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또, 새들이 살고 있는 둥지는 끊임없이 조금씩 보수공사를 하기 때문에 비바람에 대해서 유연한 힘을 유지하지만, 새들이 버리고 떠난 둥지는 힘이 빠져서 비바람에 쉽게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아마도, 자연을 거스르는 것들의 강력함은 그 외형과 구조의 견고함이 의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 강력함은 허약함을 내장하고 있지만, 이 내장된 허약함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일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거대한 허약함을 드러낸다.

자연에 포개지는 것들의 외양은 늘 엉성하고 헐겁다. 그 헐거움은 강력함을 내장한 헐거움이지만, 이 내장된 강력함도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니, 견고하다 혹은 헐겁다는 인간의 말은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말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김해 사고현장에서 돌아와서 나는 날아가는 여객기의 아름다움보다도, 높은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까치둥지가 더욱 인간쪽에 가깝다고 느꼈다. 우습고 또 무기력한 말일 테지만, 둥지를 짓는 까치들의 건축공법을 골똘히 연구해서, 이 세상의 모든 구조물들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 수는 없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아마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무기력한 말이라 하더라도 까치의 공법을 궁금해하는 인간의 꿈이 무효인 것은 아니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서 무의미한 것일 수 있다. 자연은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이며, 인과율의 적용을 받는 객관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무의미가 인간이 설정한 의미들보다 더욱 힘세게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김해 사고현장에서 삶과 죽음을 과학으로 설명할 길은 없어 보였다. 멀쩡히 걸어서 잔해 속을 헤집고 나온 사람 옆자리에서 또 어떤 사람은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삶과 죽음은 함께 비애로워 보였다. 다시 그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인간을 위로해주는 것은 광화문 가로수 꼭대기 까치둥지였다. 인간의 비행기가 추락해도 까치둥지는 떨어지지 않았다. 김훈/ 소설가·<한겨레> 사회부 기자 hoo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