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미술팀 덕분에 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하오!” 봉준호 감독이 칸에서 이하준 미술감독에게 보낸 문자라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 현지에서 접한 <기생충>의 미술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하준 미술감독은 5월 25일 열린 칸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영화 스탭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기술상 부문에 특별언급되기도 했다. <독전> <관상> <도둑들> <하녀> 등 현대물과 사극, 블록버스터와 작가영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영화미술 작업을 이어온 그에게, <기생충>은 전에 없던 도전을 요하는 작품이자 그에 상응하는 성취의 쾌감을 안겨준 영화로 기억될 듯하다.
-칸국제영화제 기술상 부문 시상에서 특별언급된 소감은.
=일주일 동안 밥을 안 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할 만큼 기뻤다. 아무래도 영화에서 박 사장(이선균) 집과 기택(송강호)의 집이 중요한 공간적 요소이기에 심사위원들이 언급했던 것 같다. 덕분에 태어나서 가장 많은 축하와 연락을 받았다.
-<기생충> 프로덕션 디자인의 기본 컨셉은 어떤 것이었나.
=이 영화에서는 부잣집과 반지하 집 그리고 그 두 공간을 연결해주는 길이 가장 중요했기에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감독님이 처음부터 강조하셨던 점이 “위에서 아래로 계속 내려가야 한다”는 거였다. 부잣집에서 반지하 집으로 내려올수록 서서히 동네의 룩도 바뀌고 비와 물도 점점 많아져야 했다. 배우들의 동선 또한 중요했다. <기생충>은 부자 동네에서 반지하 동네로 가기 위해 인물들이 계속 내려간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동선을 감독님이 주문하셨기에, 세트를 지을 때 그 동선에 맞게끔 신경을 많이 썼다.
-영화의 90% 분량을 세트에서 촬영했다. 박 사장 가족의 대저택과 기택 가족의 반지하 집을 세트로 제작해야만 했던 이유는.
=감독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들의 동선을 만족시키는 디자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먼저 박 사장 집은 극중 건축가가 지은 집으로 설정돼 디자인적인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았다. 건축 전문가들에게 인물의 동선이나 카메라 앵글의 위치를 반영한 집 구조를 보여줬더니 건축적인 접근과는 거리가 먼 구조라고 하더라. 그래서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쓰실 때 생각했던 평면도를 보면서 역으로 내부 디자인을 시작했다. 국내외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을 레퍼런스 삼아 감독님과 미술팀의 의견을 모아 공간을 조금씩 디자인해나갔다. 박 사장 집은 미니멀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크고 반듯한 집이었으면 했고 반지하 집와 대비되는 절제된 컬러와 자재를 사용하려 했다. 전주 부근 세트장 600평 부지에 1층 건물 200여평, 2층 건물 250여평 규모로 제작했다.
-박 사장 집은 여러 측면에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 속 저택을 연상케 한다. 임상수 감독이 연출한, 김기영 감독 작품의 리메이크이기도 한 <하녀>(2010)의 미술감독이었는데, <하녀>와 <기생충>의 대저택은 어떤 점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외부에 있다. <하녀>의 경우 내부는 100% 세트로 제작했지만 외부는 로케이션 촬영을 했다. 그런데 <기생충>은 저택의 내외부가 100% 세트였다. 사실 박 사장 집에서 핵심은 정원이다. 바로 이 정원 때문에 박 사장 집 전체를 세트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거실의 큰 창을 통해 펼쳐진 정원이 있어야 했고 나무들의 생김새도 중요했다. 좋은 정원에 가면 비싸고 멋지게 틀어진 소나무가 꼭 있지 않나. 그런데 감독님은 그보다 외국에서 볼 수 있는, 곧게 뻗은 초록색의 나무를 심길 원했다. 국내에서 그런 나무를 찾는 데 고생을 좀 하다가 결국 무게감과 모양이 멋진 향나무를 심기로 결정했다. 미술팀장과 함께 이 농장 저 농장을 다니며 직접 나무를 골랐다. 나무를 심을 때마다 방향을 체크하고 위치를 조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덕분에 조경에 대한 노하우가 어마어마하게 쌓였다. (웃음)
-반지하에 위치한 기택 가족의 집과 동네를 설계하며 중요하게 고려했던 점은.
=결코 세트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래서 미술팀원들에게 반지하 동네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구해오자!”고 말했다. 재개발이 시작된 장소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그곳에서 가져온 오래된 벽돌을 실리콘으로 떠서 벽돌을 만들고, 미술팀, 세트팀, 제작부를 동원해 구식 타일과 문짝, 새시, 방충망, 유리창, 대문, 연통, 전깃줄 등의 자재를 구하는 데에만 몇달이 걸렸다. 이 자재들을 미리 디자인한 세트에 대입해보니 크기가 맞지 않아 조금씩 디자인을 수정하는 불상사가 생겼는데 그런 점이 수십년간 고치고 보수한 집에서 사는, 서민적인 동네의 디테일을 만들어줬던 것 같다. 그렇게 만들다보니 점점 더 욕심이 생겨 미술팀원들과 재미있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20여동 40가구 가까이 세트로 제작한 반지하 마을의 집마다 스토리를 만들어보는 거였다. 아들과 딸을 분가시키고 할머니 혼자 폐품을 주우며 근근이 생활하는 집, 해병대를 나와 자부심이 엄청난 전파상, 아이가 많은 1층 다세대 새댁 등 각 집의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공간에 내러티브가 생겨 좋았다.
-특히 계단 위 변기가 있는 기택 집 구조가 인상적이었는데.
=우선 시나리오에 표현되어 있는 공간이 그런 모습이었다. ‘똥의 신전’이라고 감독님이 시나리오에 명명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내가 대학 다닐 때 선배와 잠시 머물던 반지하 자취방이 딱 그런 구조였다. 수압 때문에 변기를 그렇게 높일 수밖에 없으니 굉장히 사실적인 거다. 화장실에 곰팡이가 피는 현실을 한탄하며 생활했던 곳인데 그때를 기억하며 공간을 구상해나갔다.
-기택이 사는 동네를 구현할 때에는 냄새까지 구현했다고.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실제 음식물 쓰레기를 세팅한 건 ‘이곳은 세트가 아닙니다!’라는 미술감독으로서의 작은 외침이었다. (웃음) 자연스러운 ‘스멜’과 적당한 파리들이 현장의 스탭과 배우들에게 더 깊은 몰입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극중에서 ‘계단’이 중요한 미학적 장치로 곳곳에 등장한다. 계단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했나.
=영화를 자세히 보면 각 공간과 위치에 따라 계단의 높이와 넓이가 조금씩 다르다. 부잣집 계단은 우아하게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있도록 높이가 낮고 넓은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가파르고 높다. 이처럼 집 내부에 서로 다른 크기의 계단이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반지하 동네는 계단마다 크기와 높이, 넓이가 다르다. 이번 영화의 미술작업은 그야말로 계단과의 사투였는데, 나로서도 이렇게 많은 계단을 만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공간의 특색과 배우의 연기에 맞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만들었다.
-봉준호 감독이 제작을 맡았던 <해무>(2014)와 <옥자>(2017)까지 세편을 함께했다. 그와의 협업으로부터 어떤 영향과 자극을 받나.
=일단 시나리오가 무척 정교하다. 감독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과 내용이 글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음식을 만들 때 재료가 정말 중요하잖나. 그 재료를 이미 감독님은 당신의 세계에서 잘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님과의 작업이 나에게 98%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감독님은 숨어 있던 나 자신의 2%를 발견하고 그 부분을 쓸 수 있도록 독려해준다. 그것이 감독님의 능력인 것 같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함께 작업할 수 있었으면 한다.
=현재 촬영 중이다. 독특한 이야기고 재밌다. 이 작품 역시 세트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라 부담이 많이 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
● 내가 꼽은 이 장면!_ 반지하 집에 해가 들어올 때
“영화의 첫 장면, 반지하방에 빨래가 걸려 있고, 창문 밖으로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지나간다. 이 장면은 기택 가족의 반지하 집에 해가 들어오는 몇 안 되는 순간인데, 야외 세트라 해가 들어오는 시간에 정확히 맞춰 찍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리얼하고 공기의 질감까지 표현된 것 같다. 극중 비슷한 장면들이 또 등장하는데 그때는 완전 분위기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