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인 출신 아니랄까봐.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충북 청주시 흥덕구)이 건네준 명함 뒷면을 보다가 시구(詩句)가 눈에 들어왔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그가 낸 산문집 제목으로, 세상 모든 꽃이 그렇듯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꽃이 가진 향기는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 의원은 얼마 전 22개월간의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장관직에서 내려와 국회에 복귀했다. 문체부 장관 시절은 그에게 온갖 난관의 연속이었다. 그는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이하 진상조사위)를 꾸려 박근혜 정권 시절 자행된 블랙리스트 사건을 조사해 그 결과를 백서 열권에 담아냈고, 우려도 컸던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이후 차례로 열린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 한반도 평화의 초석을 다졌다. 장관 시절 늘 굳은 얼굴이었는데 오랜만에 국회에서 보니 미소가 활짝 피어 있었다.
-장관 시절 늘 검은색 머리카락을 보다가 갈색 머리카락은 좀 낯설다. (웃음)
=집 앞 미용실이 이렇게 해놨다. (웃음) 장관을 마쳤을 때 머리카락이 아주 하얬다. 주말에 미용실에 가서 검은색으로 다시 바꿀 거다.
-국정농단의 주요 범죄 중 하나인 블랙리스트를 지시하고 실행한 조직인 문체부 장관으로 인선됐는데.
=잘할 수 있을까 부담감이 컸다. 그때가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한 장(김종덕, 조윤선)·차관(정관주, 김종), 청와대 비서실장(김기춘)까지 구속된 상태이지 않았나. 특검, 검찰 조사, 감사원 감사를 연달아 받으면서 자괴감에 빠지고, 마음이 무거워진 공무원들을 데리고 조직을 잘 이끌 수 있을까. 쓰러진 문화예술 정책을 일으킬 수 있을까. 코앞에 있는 평창동계올림픽을 잘 치를 수 있을까. 무엇보다 무사히 살아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직접 겪어본 관료 조직은 어땠나.
=보통 관료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이 많지 않나. 이중 과제가 있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많은 언론이 올림픽이 실패할 거라는 전망을 내놓고, 프랑스, 독일 같은 유럽 주요 국가들이 북핵 문제 때문에 올림픽 불참을 통보하는 상황에서 관료들과 일을 해야 하지 않나. 다른 한편으로는 블랙리스트를 기획하고 지시한 청와대 비서실장, 장·차관 등은 사법 처리가 되었지만 그것을 실행한 관료들은 처벌을 받지 않아 이들에 대한 징계 또한 해야 했다.
-장관 취임사로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만약에>의 일부를 인용하며 “영혼이 있는 공무원이 되어달라”고 말했는데.
=시키는 대로 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라, 생각 없이 행동하지 마라. 내 안에 있는 영혼을 일깨워서 영혼 있는 사유를 하고 영혼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징계를 달게 받자. 눈앞에 닥친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잘 치르자. 두 가지를 주문했다.
-장관이 되자마자 차관 아래 있는 실장직을 없앤 것도 그 배경에서 내린 결정인가.
=조직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조직 개편이었다. 업무에 꼭 필요한 기조실장, 종교계에서 없애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종무실장, 블랙리스트 사건을 마무리 지은 뒤 고갈된 문예기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방안을 찾아야 할 문예실장 등 실무를 제외한 나머지 자리(체육실장, 관광실장, 콘텐츠실장)를 모두 없앴다.
-실장 승진을 앞둔 국장, 과장이 그 결정을 무척 싫어했을 것 같다. (웃음)
=보통, 있는 자리를 없애지 않는다. 없는 자리를 더 만들지. 그 자리를 없애는 건 실장은 강등당하고, 국장이나 과장은 승진 기회가 사라지는 걸 뜻하는데 이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럼에도 공무원들은 스스로 쇄신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국민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한다는 데 공감했다.
-그리고 곧바로 문체부 공무원 20여명을 징계했는데.
=감사원이 문체부를 감사해 내놓은 권고안이 나왔다. 경징계를 중징계로 올려 중앙징계위원회에 제출했다. 징계를 감사원 권고안보다 상향 조절해 올리자 징계 대상자인 공무원 2명이 나를 상대로 행정 소송을 걸었다.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건 잘못했지만 감사원에서 정확하게 감사해 내린 징계를 장관이 임의로 상향 조절한 것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 없다고 했다. 1년 반 동안 진행된 재판 결과 내가 패소했다. 패소하더라도 이 징계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상향 조절 결정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진상조사위를 꾸려 블랙리스트를 작성·실행하는 데 관여한 공무원, 산하기관 임직원 131명을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를 두고 진상조사위와 마찰이 있었다.
=131명 중에서 중복된 사람이 3명이 있으니 정확히 128명이다. 이중에서 78명에게 징계 및 신분상 조치를 내렸다. 나머지 50명 중에서 퇴직자 37명과 징계 시효가 지났거나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13명은 징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모두 징계했다. 그런데 문제가 됐던 건, 지난해 9월 13일 문체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 68명(수사 의뢰 권고 24명, 징계 권고 44명)에 대한 이행 계획’을 발표하자 진상조사위가 ‘아무도 징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반발했다. 실장이나 국장을 대동하지 않은 채 혼자서 그들을 만나 문체부의 이행 계획을 설명했다. 징계가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고, 산하기관들 또한 자체 징계위원회를 꾸려 징계를 할 것이며, 문체부는 다른 기관보다 죄가 엄중해 징계보다 높은 수사 의뢰(7명)를 한 것이다. 수사 결과에 따라 기소가 되든 안 되든 징계를 하겠다고 했다. 이 내용들을 4시간 반 넘게 설명했고 한명을 제외한 모든 문화예술인들이 이해했다.
-한명은 왜 반대했나.
=그는 처음부터 조사를 다시 하자고 했다. 약 13억원의 예산을 썼고, 백서 발간을 앞두고 있는데 조사를 다시 하면 대통령령에 근거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하고, 조사를 맡을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위원회는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나 5·18 특별법 진상규명위원회처럼 여당 추천 1/3, 야당 추천 1/3, 중도 1/3로 채워져야 한다. 야당이 반대도 하고 훼방도 놓을 거다. 이 과정만 몇년 걸릴지 모르는데 새로 한다? 인력, 시간 낭비다.
-징계 대상을 국장급 이상으로 정한 이유가 뭔가.
=감사원으로부터 권고안을 받으면서 고민했던 것 중 하나는 징계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할 것인가였다. 공무원은 복종의 의무와 성실의 의무가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청와대에서 장차관을 통해 지시가 내려와 실장과 국장을 거쳐 실무자인 사무관과 주무관까지 이른 경우다. 사무관이나 주무관은 이렇게 하달된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것인가. 여러 고민 끝에 감사원과 내린 결론은, 블랙리스트 실행 권한을 가진 사람을 국장까지로 정한 것이다. 당시 청와대 또한 국무회의에서 주무관이나 사무관까지는 책임을 묻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문화예술인들은 주무관, 사무관 같은 실무자들에게도 엄격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문체부 실장, 국장들은 자신들이 처벌을 받는 대신 사무관과 주무관을 보호하려고 한 게 큰 쟁점이었다. 장관으로서 나는 사무관이라도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분상 조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사무관이나 주무관들 또한 자신에게 책임을 물으면 징계를 달게 받겠다고 했다. 결국 이것이 추가로 논의돼 책임을 져야 할 사무관은 징계를 받았다. 중요한 건 다시는 블랙리스트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법을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사람은 무조건 5년 이하의 징역, 지시를 받고 이행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 같은, 처벌이 센 내용의 법안을 발의해 명시해놓으면 공무원들이 다시는 똑같은 행동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의원님이 대표 발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장관이었던 사람은 대표 발의를 할 수 없다. 동료 국회의원들이 많고, 정부와 여당이 적극적으로 이 내용의 법안 발의를 논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화예술인들은 정부의 조치가 여전히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자신의 영혼이 상처받은 것에 대해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 또한 충분히 이해된다.
-잘해도, 못해도 욕먹을 것이 예상됐던 문재인 정부의 첫 문체부 장관을 맡은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나.
=정부가 하는 일 100 중에서 60, 70만 전달되어도 다행이다. 정부가 문화예술인들에게 설명해서 부족하면 더 애를 써야 한다. 그래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정부는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설명하고, 또 설명해라. 그마저도 전달이 안 되면 정부 탓이다. 문재인 정부가 하는 일이 뭔지 생각하고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지난 2016년 대기업의 배급과 상영의 겸업을 금지하고 스크린 독과점을 방지하는 내용의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영비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는데 그 법안이 상정되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당시 국회가 발의된 영비법 개정안을 진행하지 않았다. 전문위원들이 법안을 검토했는데 위헌적 요소가 있다고 했다. 용역 업체를 고용해 법안에 어떤 위헌적 요소가 있는지 검토해보니 기업의 영업이익을 침해할 수 있고, 영화인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최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영비법 개정안은 영화인들과 논의해 현실적으로 실행이 가능한 스크린 상한제를 골자로 한 법안이다. 이 법안이 전문위원에게 넘어가면 나와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안철수 전 의원이 각각 낸 영비법 개정안과 함께 검토, 논의하게 된다.
-지난해 평양에서 김정은 국방위원장을 만났는데 그때 남북 영화 교류와 관련된 논의가 있었나.
=김정은 위원장과 영화 교류와 관련된 논의를 직접 나누지 않았다. 다만, 2018년 9월 북한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만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하 조평통) 위원장에게 남쪽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장비들을 제공하겠다고 전했다.
-남북 영화 교류가 문재인 정부 기간 동안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남쪽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북쪽에 여러 제안을 하면, 북은 남북정상회담에서 양국의 정상이 합의한 것부터 먼저 하자는 답변을 보내온다. 그게 군사적으로 합의한 내용인데 그것부터 해결하고 영화 교류 같은 다음 단계로 진행하자는 거다.
-장관 시절 미처 시도하지 못해 아쉬운 것도 있나.
=고갈된 문예진흥기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법적,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놓고 싶었는데 논의만 하고 나와 아쉽다. 하지만 기획재정부도 문체부도 동의했으니 구체적인 방안이 나올 것이다. 문체부는 문화예술산업을 진흥하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공무원들에게 끊임없이 설명하고 또 설명했는데 그걸 법적, 행정적 시스템으로 구축하지 못했다. 또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를 마련해 문화예술인들이 일이 없는 시기에도 실업급여 형태로 돈을 받아 기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공연을 보거나 도서를 구입하면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지만 문화예술인들이 마음껏 창작할 수 있는 환경까지 갖추지 못한 건 아쉽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준비에 들어갔는데.
=국회로 돌아오자마자 전쟁터에 나선다. 사람들은 동물 국회라고 말하는데 동물들은 이런 말을 싫어한다. 동물들에게 최고의 생존 법칙은 공존공생이지 약육강식이 아니다. 패스트트랙은 날치기가 아니며 여야가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330일 안에 합의점을 끌어내야 한다. 그러니 자유한국당은 국회로 돌아와 더 좋은 안을 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