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단편 애니메이션 모음
구리 요지와 오카모토 다다나리, 다무라 시게루. 일본 단편애니메이션 묶음에서 소개될 이들은 미소년, 미소녀 캐릭터나 정교한 메카니즘의 SF 등 눈에 익은 ‘아니메’와는 또다른 일본 독립애니메이션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가들이다. 신문 만화가로 먼저 이름을 떨친 뒤 회화와 조각, 애니메이션과 실사영상을 넘나들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온 구리 요지는 일본의 독립애니메이션을 개척해온 1세대.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채 갖가지 방식으로 때리는 여자와 맞는 남자를 그린 <인간동물원>, “사랑!”을 외치며 끊임없이 도망치는 남성과 그를 쫓는 여성을 그린 <사랑> 등 단순하고 만화적인 그림체로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된 성 이데올로기를 파헤쳐왔다. 학생, 화가, 작가 등 여러 직업군의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실사영상을 활용한 <의자>나 인간의 육체를 해체하고 새가 새장을 먹어버리는 기괴한 이미지를 선의 움직임으로 이은 <방>의 초현실주의적인 묘사 역시 그의 세계의 일부다.
구리 요지의 뒤를 이어 일본 독립애니메이션의 2세대라 할 수 있는 오카모토 다다나리는 일본의 전통과 문화적 정서를 잘 살린 인형 애니메이션으로 주목받은 작가다. 늙은 무녀와 샤미센 반주에 맞춰 노래하며 병을 고치는 신통력을 지닌 여우 오콘의 관계를 담은 <여우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인형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숲에 간 사냥꾼들이 들고양이들의 함정인 기묘한 레스토랑에 들어섰다가 잡아먹힐 뻔한다는 <주문이 많은 요리점>의 회화적인 색채와 질감,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대한 일침도 눈길을 붙들어맨다. 다무라 시게루의 <은하의 물고기>는 그림책 작가이자 만화가로 특히 그래픽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많이 했던 작가의 장점이 살아있는 작품. 은하수의 작은곰자리를 파괴하는 괴어와 싸우는 소년과 노인의 이야기로, 단순하면서도 동화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림체와 우주를 연상시키는 환상적인 배경, 보라와 파랑, 노랑 등 컴퓨터로 채색한 화사하고 명료한 색감이 잘 어우러져 있다.
황혜림
고 피쉬 GO Fish로즈 트로체/ 미국/ 1994/84
흑백영화인 <고 피쉬>는 일군의 여자친구들의 일상과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다. 좀 색다른 점이라면, 이 여자친구들을 설레게 하는 사랑과 섹스의 상대 역시 여성이라는 것. 열달 동안 혼자였으며 근사한 연애를 바라는 맥스,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강사인 키아, 키아의 연인인 이혼녀 이비, 타지로 떠난 뒤 소원해진 애인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일라이 등 여성들의 작은 공동체 속으로 파고든 카메라는,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촘촘한 수다로 엮어 보여준다.
“레즈비언이라 의심되는 사람들을 꼽아 보세요.” 강의 도중 키아의 질문에 버지니아 울프부터 휘트니 휴스턴에 이르는 각양각색의 인물을 늘어놓던 수강생들은, 억측에 가까운 목록을 왜 꼽아보냐고 되묻는다. “레즈비언의 역사를 알고 싶어도, 레즈비언 관계는 기록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고 매장돼 있다”는 키아의 답으로 운을 뗀 <고 피쉬>는,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누락돼 온 레즈비언들의 사랑에 대한 경쾌한 탐색이다. 과연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외로운 불안,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설 때의 조심스러운 밀고 당김, 데이트를 앞두고 어떤 옷을 입을까 하는 망설임과 수줍게 첫 키스를 나눈 직후의 머쓱함. 사랑을 시작하려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거쳐갈 법한 에피소드로 꾸린 맥스와 일라이의 연애담은 여느 연애영화 못지 않게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는 한편, 여성들간의 섹스와 욕망을 솔직하게 묘사함으로써 이성애 사회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드러낸다.
인종 차이도 넘어선 키아와 이비, 수시로 애인을 바꾸는 자유분방한 다리아 등 다양한 사랑의 행로를 보여주는 주변 친구들의 일상도 마찬가지. <고 피쉬>는 이들의 사랑 또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불가해한 물음을 풀어가는 하나의 과정임을 일깨우는 한편, 결혼으로 이성애 사회에 편입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남성과 섹스를 나눈 레즈비언에 대한 적개심과 같은 레즈비언 공동체의 내면을 꾸밈없이 담아낸다.
황혜림▶ 씨네21 [2002전주데일리]홈페이지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