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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전주데일리]30일 추천작 두편
2002-04-30

호텔, 악령

호텔

마이크 피기스 | 이탈리아, 영국 | 2001 | 114분

영국 언론은 <호텔>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일간지들은 별 하나부터 여섯 개까지 다양한 평점을 매겼지만, 어느 신문도 같은 감독의 영화인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 보냈던 열광을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텔>에는 대놓고 혹평만 할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아마도 <가디언> 지의 말대로 “관객보다는 감독이나 배우에게 가치가 있었을 실험”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호텔>은 매우 혼란스러운 이야기다. 영화의 첫머리에 존 말코비치가 연기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그날 밤 창살 안에서 사람들과 식사를 한 뒤 아마도, 호텔 지하 주방으로 옮겨져 요리가 된다. 이야기는 곧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다. 중심이 되는 무리는 존 웹스터의 후기 희곡 <멀피 공작부인>을 도그마 영화로 만들기 위해 베니스에 묵고 있는 촬영팀이다. 이들은 문제가 매우 많다. 감독은 자기 재능에 도취돼 제멋대로 굴고 배우들은 낯선 촬영 형식에 난감해한다. 제작자는 감독을 증오하며 제거하려고 한다. 마침내 감독은 제작자가 보낸 킬러에게 희생돼 혼수상태에 빠진다.

마이크 피기스는 자신의 첫번째 디지털 영화 <타임코드>에서 인상적인 기법을 보였다. 가능한 실험을 모두 시도하려한 듯한 이 영화는 화면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분할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진행했다. <호텔>도 비슷한 기법을 시도하지만 이번엔 하나의 장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는 살마 헤이엑이나 데이비드 쉼머, 줄리언 샌즈처럼 유명한 배우들을 거느리고도 자신만의 실험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특유의 느슨한 유머와 호텔 종업원들이 은밀하게 행하는 식인 등 자잘한 재미도 잊지 않았다.

김현정

악령

마리 오하라 | 필리핀 | 2000 | 102분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종종 말해진다. 필리핀 영화는 그 길었던 마르코스 독재 시절을 어떻게 기억해낼까.

필리핀 네그로스 섬의 부잣집 딸인 니나는 어릴 때부터 마르코스 대통령의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학살과 복수극을 목격하고 자란다. 섬에는 공산 반군 외에, 정치 이념과 무관한 강도집단까지 나타나 살육을 배가시킨다. 그 원혼들의 상징처럼 섬의 숲 안에 악령이 살고, 가끔씩 니나에게도 모습을 비춘다. 그 와중에서도 니나는 온전한 의식을 갖고 성장해 마닐라의 대학에 가지만 이 섬의 비극적 역사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섬에서 함께 자란 노동자 계급의 아들 호세에게 잠깐 연정을 느끼지만, 호세는 가족들이 정부군에게 학살당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잔혹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다.

공포영화의 틀을 빌었지만, 영화적 장치를 압도할 만큼 직설적으로 등장하는 마르코스 폭압의 현장에 대한 묘사가 영화에 독특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반 마르코스의 정치적 입장이 너무 분명해서, 죽고 죽이는 비극의 역사를 상징하기 위해 끌어들인 악령이라는 존재의 초현실성이 반감되지만 마리 오하라 감독은 거기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꿈많고 호기심 가득한 부잣집 소녀의 성장영화 같던 도입부의 분위기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은 더할 나위없이 처참하다. 그 지독한 역사와 화해는 커녕 재해석할 여지조차 없다는 듯, 그 역사에 악마의 낙인을 찍은 뒤 수정이 불가능하도록 봉해버린다. 마리 오하라는 70년대 필리핀 영화를 대표해온 리노 브록카 감독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하기도 했다.

임범▶ 씨네21 [2002전주데일리]홈페이지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