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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회 아카데미④] 2019년 아카데미의 다크호스, 주요 부문 후보 지명된 <바이스> 이야기
장영엽 2019-02-27

미국 정치, 실세란 무엇인가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다크호스는 단연 <빅쇼트>를 연출한 애덤 매케이 감독의 <바이스>다. 작품상, 감독상, 남우 주·조연상, 각본상 등 아카데미의 주요 부문에 빠지지 않고 후보로 오른 이 작품은 조지 W. 부시 정부의 진정한 실세였던 딕 체니 전 부통령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2000년대 초, 그러니까 조지 W. 부시의 행정부 시절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메인 작가로 일하고 있었던 애덤 매케이는 무대 뒤편에서 “고요하고, 인내하며,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관료(딕 체니)가 세계 역사를 바꿔놓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바이스>를 완성했다고 한다. 4월경 국내 개봉예정인 <바이스>를 미리 관람했다. 영화를 보기 전 알아두면 좋을 여러 가지 일화들을 먼저 소개한다.

딕 체니는 누구?

“다음 이야기는 실화다. 혹은 실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딕 체니는 역사상 손 꼽히는 비밀스러운 지도자였으므로.” <바이스>는 이같은 문장으로 영화의 포문을 연다. 딕 체니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부통령이자 네오콘(미국 신보수주의자들)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대통령에 준하는 파워를 가졌다고 얘기되는 인물치고 그의 의중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애덤 매케이는 딕 체니의 전기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러한 이야기의 빈틈을 인정하고, “X나 최선을 다해” 납득 가능한 상상력으로 서사의 구멍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1941년 네브래스카주 링컨에서 민주당원 출신 부모에게 태어난 딕 체니는 광활하고 목가적인 와이오밍주 캐스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공부에 큰 뜻이 없던 그는 예일대학교를 중퇴하고 전기설비공으로 일하다가 다시 와이오밍대학교에 입학해 정치와 문학을 공부했고, 1965년 와이오밍주의 상원 입법부 교생으로 자신의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특유의 수완과 기지로 정계에서 빠른 성장 가도를 달린다. 공화당 하원의원과 석유 대기업 헬리버튼 사장, 걸프전 당시 국방장관과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부통령이 그의 주요 보직이었다. 부통령으로 재직 중이던 당시 체니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네오콘들을 요직에 앉히는 한편 9·11테러를 계기 삼아 21세기 세계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이라크 전쟁을 벌인다. 그 밖에 체니는 뉴스라면 양쪽의 입장을 동일하게 다뤄야 한다는 ‘형평의 원칙’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환경보호와 관련된 법을 반대하며, 고문과 영장 없는 감시를 허용하는 등 미국 사회에 명암을 드리우는 수많은 적폐를 행한다. 애덤 매케이는 <바이스>를 통해 관료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한 개인이 내린 결정이 전세계 수백만명에게 영향을 미쳤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어디 출신인지조차 모른다는 세태의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고요한 실세

“자넨 조용해서 맘에 들어. 무슨 패를 쥐고 있는지 떠들어대지 않지.” 극중 자신의 보좌관으로 일하게 된 딕 체니에게 공화당원 도널드 럼즈펠드(스티브 카렐)는 이렇게 말한다. <바이스>가 묘사하는 딕 체니의 모습은 전기영화의 주인공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요하고 차분하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기보다 상대의 반응을 먼저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동안 몇수 앞을 내다보는 이가 마침내 움직이는 순간의 파급력을 영화는 극적으로 묘사해낸다. 배우 크리스천 베일이 유려하게 선보이는 무게감 있는 인물 묘사가 이 영화의 드라마와 무드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영화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크리스천 베일은 머리를 삭발하고 체중을 20kg 늘리는 등의 노력을 통해 딕 체니의 외양 또한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극중 조지 W. 부시로부터 여러 차례 부통령 제안을 받고도 꿈쩍 않던 딕 체니가, 부시와 독대한 자리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 자신의 엄청난 패를 내보이고 마침내 부시로 하여금 거대한 미끼를 물게 하는 장면의 긴장감 넘치는 침묵이 특히 압권이다.

도널드 럼즈펠드와 린 체니

<바이스>에는 두명의 주요 조연이 등장한다. 전도유망한 정치인이었던 딕 체니를 정계 깊숙이 이끈 정치 선배 도널드 럼즈펠드와 딕 체니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그의 아내 린 체니다. 백악관 수석보좌관과 국무부 장관을 역임한 럼즈펠드는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비속어와 윤리적으로 적절치 못한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 거침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내각에서 국무부 장관을 맡아 9·11테러에 대한 응징으로서의 군사작전과 미국이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치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다. 극중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정적은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냉혹한 승부사로서 럼즈펠드의 모습은 젊은 시절의 딕 체니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남우조연상 후보로 조지 W. 부시를 연기한 샘 록웰보다 럼즈펠드를 연기한 스티브 카렐이 지명되었다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도널드 럼즈펠드로 분한 스티브 카렐의 연기는 만족스럽다. 영화의 말미에는 노년의 딕 체니와 럼즈펠드 사이에 오가는 잊을 수 없는 대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린 체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딕 체니도 없었을 것이다. <바이스>의 초반부에는 대학을 중퇴하고 술독에 빠져 살던 딕을 린이 매섭게 몰아세우는 장면이 있다. “나는 명문 대학에 갈 수 없고, 회사 사장이나 시장이 되지도 못해. 이 세상이 여자에겐 그래. 난 당신이 필요해. 그런데 지금 당신은 세상 쓸모없는 인간이야. 앞으로 달라질 거야? 아니면 내가 시간낭비하는 거야?” 린의 이 말 한마디가 딕 체니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남편이 권력을 잡은 뒤, 현명한 조력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찾는 여성으로 분한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도 기억할 만하다.

트럼프 시대와의 연결지점

이 영화가 올해 아카데미의 주요 부문 후보작으로 선정된 이유를 좇다보면 딕 체니가 권력을 잡았던 시절의 공화당 행정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트럼프 시대 미국 사회와의 느슨한 연결고리가 보인다. <바이스>는 트럼프가 편애하는 <폭스뉴스>의 탄생과 저학력 블루칼라 백인 보수층의 표심을 공략하는 선거 운동, 영향력 있는 재벌 가문의 우익 두뇌 집단 후원, 딕 체니가 이끈 대기업 규제 철폐 정책 등 여러 장면에서 트럼프 행정부를 떠올리게 하는 부시 행정부 시절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애덤 매케이 감독은 “트럼프는 악행으로 치면 딕 체니와 부시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며 퇴임 후 존중받으며 거리낌없이 대외 활동을 하고 있는 그들의 행보가 마치 대량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회고하는 <액트 오브 킬링>(2013)의 암살단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바이스>에서 몇명의 정치인들이 밀실에서 구상한 정책으로 인한 세계 곳곳의 전쟁과 폭력, 비극은 딕 체니를 비롯한 실세들의 고요한 얼굴과 교차편집된다. 이 비극으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진정한 이 사회의 악(vice)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바이스>가 올해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목받아야 한다면, 그건 이 영화가 이러한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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