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 프로듀서는 문제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장벽을 돌파해왔는가’.
크리스틴 바숑은 자신의 영화 여정을 담은 책 <슈팅 투 킬>(Shooting To Kill-How an Independent Producer Blasts Through the Barriers to Make Movies that Matter)에서 “저예산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출산하는 것과 같다”고 쓴 바 있다.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고, 끊임없는 설득과 절충을 거쳐야 하는 독립영화 만들기의 과정을 산고에 비유한 것이다. 이같은 저예산 독립영화를 고수해온 배경에는,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감독들의 개성적인 시선을 최대한 살리고자 하는 프로듀서로서의 고집이 숨어있다. 프로듀서로서 처음 이름을 올린 토드 헤인즈의 91년작 <독약>부터 <졸도> <고 피쉬> <키즈>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 등 바숑이 제작한 영화들은 할리우드 주류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시선과 돌파력을 지녀왔으니 말이다.
이는 때로 원인모를 질환에 시달리는 중산층 여성의 이야기인 <세이프>에서처럼 안정된 이성애 문화가 실은 질병 못지 않은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미묘한 퀴어적 발언일 수도, 가부장제적 권위를 파괴하기 위해 남성을 제거하자는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의 발레리 솔라나스의 과격한 직설일 수도 있다. 혹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며 오로지 섹스에만 탐닉하는 <키즈>의 10대들에서 보듯 기성 세대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거친 욕망의 배설로 드러나기도 한다. 어느 쪽이건 바숑이 제작한 영화들은 성적 소수자를 포함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상대적인 약자들에 대한 시선을 담보하며 문제 제기를 서슴치 않았다. 스스로 “도발이라 생각되는 것들에 끌린다”며 “사회적 성(gender)을 둘러싼 이슈는 물론 흥미롭고 도발적”이라는 바숑은 1990년대 미국 뉴퀴어시네마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상업영화에서 쉽게 다루지 않는 삶의 불온한(?) 구석에 주목하는 독립영화계의 전투적인 여성프로듀서로 자리매김해왔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그런 바숑에게, “정치적 태도가 명확한 영화들의 대모”란 수식어를 붙여주기도 했다.
뉴욕 출신인 바숑은 비디오가 나오기도 전인 1970년대에 우디 앨런의 영화와 유럽 예술영화를 찾아 극장을 드나들며 10대를 보냈다. 또한 당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피터 보그다노비치, 로버트 앨트먼 등이 미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던 “전설적인 시절”을 관객으로 살았던 바숑에게, 영화는 자연스럽게 다가온 꿈이기도 했다. 브라운대에서 기호학을 전공한 뒤, 바숑은 공포영화를 비롯해 많은 영화에서 커피를 나르는 일부터 어시스턴트 프로듀서, 로케이션 매니저 등을 거치며 영화 현장을 체험했다. 대학 동창인 토드 헤인즈와의 친분은, “혼자서 장편영화를 제작한다는 게 뭔지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독약>으로 프로듀서의 길을 열어줬다. 지금이야 주류 영화에서도 동성애를 소재로 다루곤 하지만, “게이영화나 퀴어영화같은 말조차 거의 없었던” 당시 <독약>은 극장에서 소외됐던 게이 커뮤니티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뜻밖의 성공을 거뒀다. 평단의 호평과 함께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는 한편, 미국가족협회가 의회에 “우리의 세금이 게이 남성의 포르노그래피를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항의와 함께 찬반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뒤로도 뉴욕 10대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았다는 평과 선정적인 포르노그래피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키즈>, 실화에 바탕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충격을 던진 <소년은 울지 않는다> 등 바숑이 손댄 영화들은 미국 영화계에 논쟁의 에너지를 제공해왔다. 이같은 에너지는 제작 중인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 등과 함께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독약>부터 <소년은 울지 않는다>까지, 바숑이 제작한 10편의 문제적 영화를 소개하는 ‘크리스틴 바숑 회고전’에서는 그 지나온 궤적의 일부를 돌아볼 수 있다.
황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