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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 최국희 감독·오효진 프로듀서, "긴박했던 운명의 일주일에 동참해주길"
임수연 사진 오계옥 2018-12-05

최국희, 오효진(왼쪽부터).

<국가부도의 날>은 복기하기 괴롭지만 직시해야 하는 진실을 들추는 영화다. 최근 대중문화 영역에서 90년대를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수많은 실직자를 양산한 IMF 금융위기도 분명 그때 있었다. 더 나은 대책을 모색하는 충실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급한’ 처방책이었다는 정당한 비판은, 여전히 교과서나 미디어에서 적극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비주류’이다. 여성 캐릭터가 이끄는 작품에 투자를 주저하는 한국영화계의 분위기 속에서도 위기를 감지하고 정부 관료와 맞서는 주인공 한시현(김혜수)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은 이 프로젝트에 필연적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영화제에서 엄성민 작가의 <국가부도의 날> 시나리오를 접한 후 이틀 만에 연락했다는 오효진 프로듀서, 연출 제안을 받은 후 몇 시간 만에 마음을 결정했다는 최국희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효진 프로듀서는 2016년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여자가 도구로 쓰이지 않는 작품을 하고 싶다”, “실제로 여성감독과 개발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함께 자리한 최국희 감독이 여성은 아니지만(웃음), <국가부도의 날>도 그런 포부의 일환이었나.

=최국희_ 많은 분들이 내 이름만 보고 여자감독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웃음)

=오효진_ 새 경제수석 역의 김홍파 선생님도 처음 미팅 때 “국희가 남자야?”라고 물어봤다. (웃음) 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여성영화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남자 캐릭터로 바꾸어도 굴러가는 이야기지만, 작가님이 “모두가 문제없다고 얘기할 때 문제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당시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주인공을 여성 캐릭터로 설정했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그리고 나나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나 여자라서 그런지 여자가 도구로 쓰이지 않는 작품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사명감 아닌 사명감이 있는데, <국가부도의 날>은 이에 부합한 작품이었다. 사실 <국가부도의 날>은 많은 투자·배급사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은 작품이다. 각 회사가 거론한 감독 추천 리스트가 있었다. 최국희 감독은 CJ로부터 추천을 받았는데, 작품의 성격과 잘 맞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소재만 보면 장르물로 풀기 어려워 보이지 않나. <스플릿>(2016)에서 볼링 소재로 액션영화를 만든 최국희 감독이라면 이 작품도 장르적으로 잘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고로 당시 인터뷰에서 언급한 작품은 지금 영화사에서 준비 중인 <가장 보통의 연애>다.

최국희_ 첫인상이 강렬하게 남은 시나리오였다. 나 역시 금방 읽었고, 다루기 어려운 내용이라 잘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읽은 후 작품을 보내준 CJ 관계자에게 몇 시간 만에 ‘재미있다, 하고 싶다’라고 말했더니, 이렇게 바로 대답하면 안 된다고 좀 기다렸다 답을 줘야 한다고 한 게 기억난다. (웃음)

-시나리오에는 한시현 팀장이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설정이 있었는데 본 영화에서는 편집됐다.

최국희_ 촬영도 다 했는데 빠진 장면이다. 그 시대에 여성이 그 정도 지위에 오르기까지 굉장히 힘들었을 테고, 쉽지 않은 일을 하는 데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더라. 강박증이 있다는 설정이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여성 캐릭터를 약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재정국 차관이 단순한 악역으로 보이지 않게끔 배우와 논의한 부분이 있었나.

최국희_ 조우진 배우는 캐릭터가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 본인이 이해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차관이 가진 신념과 그런 신념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당시 경제 관료들은 친미주의자, 1세대 유학파가 많았고 그들은 세상이 미국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고 봤다. 그들이 생각하는 시장주의에 대한 강한 믿음도 갖고 있다. 이분법적으로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그 나름의 입장을 가진 관료로 표현했다.

-스테인리스 그릇을 만드는 소기업 사장 갑수(허준호)는 결국 자살을 고민할 만큼 감정적으로 바닥까지 추락한다. 그런데 이런 인물의 서사를 그릴 때 자칫 신파로 빠지지 않게 고민된 부분은 없었나.

오효진_ 실제 뉴스를 찾아보니 당시 자살자가 정말 많았다. 생각보다 더 많았다. 차마 그 뉴스는 직접 쓸 수가 없었고, 갑수의 이야기는 현실을 덤덤하게 담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과장을 의도했다면 자살 직전 갑수의 아이들인 현수, 현아의 얼굴을 더 보여준다든지 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 부분은 최대한 덤덤하려고 노력했다.

-경제위기를 이용해 돈을 버는 윤정학(유아인)은 자칫 휴머니즘을 가진 것처럼 비쳐지면 캐릭터가 무너질 수 있다. 또 그의 말에 설득돼 투자를 결심하는 오렌지 역의 류덕환은 생각지 못한 캐스팅, 반가운 얼굴이었다.

최국희_ 윤정학은 가장 복잡한 인물이다. 누구보다 빨리 위기를 감지한 인물이기도 하고.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면서 예측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두려워하는 심리까지 드러내야 하는 굉장히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유아인 배우가 정말 잘해준 덕분에 윤정학이 일차원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분량이 많지 않은데도 캐릭터를 잘 표현해준 배우에게 감사하다.

오효진_ 류덕환 배우가 주연을 많이 했던 친구라 이렇게 작은 역할을 할까 했는데, 시나리오에 너무 공감했다며 기존 역할보다 분량이 적어도 출연을 결심해줬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오렌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얘기를 본인에게 해줬더니, 다들 시커먼 옷을 입고 나오는데 나만 이상하게 입고 나와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웃음) 좀 미안한 마음도 있다. 그 시대를 보여주기 위해 캐릭터에 과장된 비주얼을 몰아준 면이 있다.

-그외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의 조화가 중요했다.

오효진_ 영화 주 캐릭터 중 여성이 몇명 없기 때문에 한시현을 믿고 따르는 여성 팀원 강윤주의 캐스팅이 정말 중요했다. 뻔하기보다는 좀 의외의 캐스팅을 하고 싶었다. 박진주 배우가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나온 것을 봤는데, 코믹한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굉장히 똘똘해 보이더라. 그때 매력을 느꼈다. 박진 역의 장성범은 조연 중 가장 먼저 캐스팅이 확정됐다. <군함도>(2017)나 tvN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그 배우가 나오면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딱 몰입이 되더라. 이대환 역의 조한철 선배는 엄성민 작가가 “내가 모든 배우에게 빚을 졌지만, 가장 많이 진 게 조우진, 조한철 배우다. 내가 썼던 대사보다 너무 연기를 잘해줬다”고 했던 사람이다. 성별을 떠나서 한시현을 믿고 지지하는 느낌을 잘 살려줬다. 그분도 목소리가 정말 좋은데, <국가부도의 날>은 대사가 많기 때문에 음성과 배우들 목소리의 베리에이션이 특히 중요했다. 어려운 대사를 듣기 싫은 목소리로 들으면 안 되지 않나. (웃음)

-세 가지 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조명부터 촬영까지 다른 톤으로 촬영됐다.

최국희_ 각각의 이야기마다 색깔이 있고 컨셉도 조금씩 다르게 잡았다. 재정국 차관과 사적으로 만나는 재벌 3세(동하)가 등장하는 부분은 채도가 높고 화려한 색을 썼다. 갑수 이야기는 필터를 최대한 쓰지 않고 날것의 느낌을 담기 위해 핸드헬드로 찍었다. 한시현 라인이나 윤정학 라인은 드라마치고 카메라 이동이 상당히 많다. 전반적으로는 뒤로 갈수록 점점 색을 빼서 마지막 협상 장면은 좀 리얼한 색감을 담으려 했다. 얼굴도 날것 느낌으로 보여주는 게 주된 컨셉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퀀스는 단연 힐튼호텔에서 진행된 IMF측과의 협상 장면이다.

최국희_ 배우들의 연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흐름을 끊지 않고 마음껏 연기할 수 있게끔 컷도 짧게 하지 않았다. 180도 라인을 넘어가면 카메라를 다시 세팅해야 하니까, 한쪽 라인에서 찍을 수 있는 것을 쭉 찍고, 그렇게 여러 번 반복 촬영하고, 현장에서 컷을 고르지 않고 편집할 때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초반에는 이보다 더 친절할 수 없을 만큼 설명적인 대사가 많이 등장한다. 가령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빅 쇼트>(2015)처럼 너무 친절하지만 않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가 너무 대사에 의존한다, 설명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효진_ 서브프라임 사태와 국가부도라는 재난을 가져온 IMF 금융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국가부도의 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IMF에 대해 알려진 것 이면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최대한 쉽게 풀어서 전달해야 진정성이 생긴다고 봤다. 금융 컨설턴트를 찾아가 일반인 수준에서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문을 받아서 금융 용어를 좀더 쉽게 바꾸기도 했다.

-“대우가 위험하다고 합니다” 같은 장면은 연출의 힘이 돋보였다. 미도파백화점의 도산도 묵직한 충격을 준다.

최국희_ 어디가 위험하다, 하루에 몇개 기업이 도산했다는 것을 말로만 하는 것보다 비주얼화하는 것이 낫겠다며 상상하다가 만든 게 판을 만들고 빨간 줄을 쫙쫙 긋는 것이었다. 4위 기업 대우까지 올라갔을 때 주는 공포 같은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오효진_ 미도파는 98년 초에 최종 부도 처리가 됐기 때문에 영화에 쓰인 것은 98년 초 뉴스 화면이다. 편집감독님이 미도파백화점을 좀더 짚어주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의견을 줘서 영화적 허용으로 그 뉴스를 가져와 썼다.

-모라토리엄 선언이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을 거라는 한시현의 주장은 실제로도 존재했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밀려 그다지 주목받지 않은 소수의견이었다.

오효진_ 그게 바로 엄성민 작가의 시나리오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굉장히 신선했다. 당시에는 소수였고 지난 20년 동안 그 의견에 대한 분석이 조금씩 등장했지만 아직 이 이슈가 지상파 방송이나 영화에서 나온 적이 없다. 이를 제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 물론 IMF 구제금융이냐, 모라토리엄이냐 하는 문제는 아직 어느 쪽이 맞다고 합의된 정답이 없고,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영화에서 이를 보여주는 게 굉장히 용기 있게 다가왔다.

-당시 그 의견이 묵살당한 것이 서울대 출신, 미국 유학파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는 학계 분위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오효진_ 촬영 들어가기 전에 만난 경제 전문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IMF 구제금융을 받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며 정부에 불려갔던 몇몇 전문가들이 있었는데, 그때 그들만의 리그 같은 게 있었다고.

-재정국 차관을 비롯한 경제 관료 캐릭터들이 현실의 특정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오효진_ 어쩔 수 없이 특정 인물이 떠오를 것 같긴 한데, 한 사람만을 모델로 하지는 않았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으면 이야기가 복잡해질까봐 여러 인물을 합쳐서 만든 캐릭터였다. 사실 재정국 차관이 다시 경제 관료로 일하는 내용을 담은 버전의 시나리오도 있었는데, 경제 개혁이 대사로 등장하는 영화 내용상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바꿨다.

-당시 뉴스 화면이 방대하게 등장한다. 그걸 찾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테고, 연출 면에서는 이를 너무 시사 교양 프로그램처럼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고민도 있었겠다.

최국희_ 시나리오 기획 단계부터 이건 뉴스가 많이 들어갈수록 풍부한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세 갈래로 나뉜 이야기 구조가 뉴스를 쓰기 굉장히 좋고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없었다.

오효진_ 후반작업을 할 스탭을 많이 남겼다. 우리가 찾은 저용량 방송클립만 600기가였다. 1천개 정도의 뉴스 방송 중 좋은 걸 골라 방송국에 요청했는데, 정말 이걸 다 구입할 거냐고 물어보더라. 신문 기사도 500~600개 찾았다. 사실 IMF가 20년 동안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기 위해 1998년부터 2016년까지 경제 뉴스도 찾았다. 그런데 편집을 해보니 좀 계몽적으로 보일 것 같다는 우려가 있어 결국 그 부분은 들어냈다.

-20년 후인 현재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말 것인가,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고민이 있었겠다.

오효진_ 초고에서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이기도 하다. 조금 조심스러운 워딩이지만, ‘헬조선의 시작’이라는 표현을 기자들이 먼저 썼더라. 사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긴 했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20년 후 모습이 나와야만 했다. 등장인물들이 IMF를 겪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짧지만 조금이라도 보여주는 게 영화의 기획 의도라고 생각했다. 20년 후 이야기가 지금보다 훨씬 열린 결말로 끝나는 버전도 있었다. 한시현은 그냥 재야에 묻혀 무언가를 연구하면서 끝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혜수 선배님에게 피드백을 받고 우리도 회의를 거치면서, 여기까지만 보여주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는 말이 나왔다. 고민하다가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결말을 만들어보자는 의견이 있어 한시현이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이야기를 덧붙였으면 좋겠다고 작가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엄성민 작가가 그가 남자에 의해 발굴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이며 2017년에 한시현을 찾아가는 아람 캐릭터를 만들었다. 특별 출연 배우가 연기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다고도 했다.

-아람을 연기한 한지민의 카메오 출연은 마치 <미쓰백> 개봉 이후 추가 촬영을 한 것처럼 시의적절하다. (웃음) 두 세대의 여자배우가 조우하는 묵직한 감동이 있었다.

오효진_ 운이 정말 좋았다. 우리가 염두에 둔 후보가 몇명 있었는데, 김혜수 선배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여쭤보니 지민씨가 너무 좋겠다고 했다. 실제로 몇달 전 사석에서 만난 후 친해졌다고도 했고. 김혜수는 그가 가진 선의, 이런저런 사회적 관심이 가짜로 다가오지 않는 진실성 있는 배우이지 않나. 아람을 연기한 배우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지민씨는 좋은 활동을 많이 하는 분이다. 실제로 한지민씨를 만나서 얘기해보니 <허스토리>(2017) 등 좋은 영화에 참여하는 것을 굉장히 의미 있게 생각하더라.

-준비 중인 차기작이 있나.

최국희_ 아직 아무 계획이 없다. 요새 어떤 게 좋은 영화인가 다시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한다.

오효진_ 공효진, 김래원 주연의 <가장 보통의 연애>(감독 김한결) 그리고 <국가부도의 날>을 같이한 엄성민 작가와 다른 작품을 준비 중이다. 언론 이야기를 다룬다. 이번에도 사회과학 분야의 방대한 취재가 필요한 영화를 준비하게 됐는데, 나랑 취향이 잘 맞는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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