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스와 노부히로, 중국의 왕샤오솨이, 한국의 문승욱. 해마다 영화적 개성이 각기 다른 세 감독의 디지털 영화를 제작, 상영해온 전주국제영화제의 특별기획 ‘디지털 삼인삼색’은 올해 이들의 디지털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전쟁과 영화’를 주제로 내세운 전주영화제가 세 감독에게 던진 공통의 화두는 ‘전쟁 그 이후’다.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동일한 사회적 사건을 각기 다른 입장에서 거쳐온 아시아 세 나라의 감독들, 더구나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세대인 이들은 전쟁에 대해 어떤 기억과 단상을 담아냈을까. 4월27일 디지털 상영관인 덕진예술회관에서 상영될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 <설날> <서바이벌 게임> 등 3편은, 세 감독의 전쟁에 대한 사적인 진술을 담고 있다.
스와 노부히로의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는, 히로시마를 어떻게 영화에 담아낼 것인가를 둘러싼 감독과 배우의 만남을 담은 영화다. 전주와 광주 등의 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스와 노부히로는 데뷔작 <듀오>부터 새로운 영화만들기의 방식을 탐색해온 감독. 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M/OTHER>,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리메이크하는 과정을 담은 <H 스토리> 등 기초적인 상황과 대사를 설정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배우들에게 변주의 자유를 주는 즉흥적인 영화 실험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 역시, 그러한 실험의 일환이라 할 만하다. ‘전쟁 그 이후’란 주제에서 자신이 히로시마 출신이란 것과 피폭에 생각이 미쳤다는 감독은, 피폭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사람들의 일상 사이에서 뭔가를 찾아내려 했다. 당시 인터뷰 음성자료에 바탕한 애초의 구상은 <나비>에서 김호정의 연기를 본 뒤 다르게 구체화됐다.
감독이 통제하는 것보다 동료들과 함께 고민한 자발성의 결과가 더 재밌다는 생각을 영화로 실행해왔던 그는, 김호정씨에게 디지털 영화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스와 감독과 나는 스위스의 한 영화제에서 만났다. 그로부터 8개월 뒤, 나는 그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는 김호정의 보이스 오버로 시작되는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는, 두 사람이 히로시마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좇는다. 감독의 부탁으로 히로시마에 온 김호정은, 감독을 만나지 못하고 재일교포를 통해 히로시마를 둘러봐 달라는 메시지만 전해 듣는다. 영화를 어떻게 풀어야 할 지를 고민하던 감독은, 어린 아들과 함께 새삼 자신의 삶의 터전이던 히로시마를 돌이켜본다. 피폭 영상과 함께 언제나 1945년의 그날을 되살리는 평화기념관, 완전히 붕괴되다시피했던 과거를 찾아볼 수 없게 재건된 도시, 역사의 그림자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젊은이들. 히로시마에서 자랐지만 전후 세대인 감독, 그저 역사적 사건으로 알고 있던 히로시마의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는 한국 배우를 시점을 옮겨가며 따라가는 영화는 전쟁의 과거를 간과하지 않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의미에서 이방인인 두 사람의 시선으로 반문하는 과거의 의미와 일상의 공간인 현재의 히로시마에 대한 성찰이 진지하고 흥미롭다.
<히로시마에서 온 편지>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담보하고 있다면, 왕샤오솨이의 <설날>은 그야말로 전쟁 그 ‘이후’에 대한 영화다. 국내에도 개봉한 <북경자전거>의 감독 왕샤오솨이는 지아 장케, 장 위엔 등과 더불어 지하전영에서 활동하며 6세대라 불리는 젊은 감독 중 하나. 역시 전후세대인 그의 관심사는, 전작에서 그러했듯 자본주의 유입과 함께 급변하는 중국 사회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이다. <설날>은 설을 앞두고 위암으로 위독한 아버지를 찾아가는 딸의 이야기. 미국에 가 있던 딸과 어머니는 9·11 사태로 미국 이민자에 대한 영주권 심사가 지연되면서 발이 묶이고, 중국에 남은 아버지는 사경을 헤맨다. 마지막이 될 설을 집에서 맞고자 퇴원한 아버지는 가족을 기다리지만, 간신히 중국으로 돌아온 딸만 보고 눈을 감는다. 역시 부인을 미국에 떠나보내고 아버지를 간호해온 외삼촌과, 병원과 집을 오가며 애타게 아버지를 지켜보는 딸의 표정에 집중된 카메라의 움직임은 지극히 단조롭다. 하지만 중국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설과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모이지 못하는 가족의 풍경에서, 가족의 해체와 90년대 중반 이민 열풍 등 변화하는 중국 사회의 삶을 읽어낼 수 있다. 문승욱 감독의 <서바이벌 게임>은 “사는 게 전쟁 같다고들 하는데, 폭력을 포함해 다양하게 내재된 일상의 전쟁을 담고 싶다”던 그의 말대로 현대 사회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인들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디지털로 찍은 장편영화 <나비>를 끝내고 “30대 중반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생존”이었다는 그는, “전쟁과 한 쌍을 이루는” 생존이란 단어와 서바이벌 게임을 연결시켰다.<서바이벌 게임>의 주인공은 사기 혐의를 받고 서바이벌 게임장으로 도피한 증권회사 직원. 고깃집에서 거래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는가 하면, 손님의 권위를 내세우며 종업원에게 폭언을 퍼붓는 주인공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생존 싸움의 단면을 보여주는 전반부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서바이벌 게임장에 숨어든 주인공이 가짜 총알로 죽고 죽이는 전쟁놀이에 참가하면서 게임과 현실이 뒤섞이는 후반부는 생존을 둘러싼 강박관념과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의 장점을 살려 민첩하게 숲을 누비며 포착한 서바이벌 게임은, 결국 포기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삶이라는 부조리한 게임, 혹은 전쟁에 빠진 우리네 모습에 대한 우화에 다름아니다.
황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