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See What’s Next: Asia’를 빛낸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넷플릭스 경영진과 <킹덤>,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 6, <나르코스: 멕시코>, <모글리> 등 신작 라인업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한 배우 및 제작진이 행사가 열린 마리나 베이 샌즈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20년 전 영사기와 카메라의 발전은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영화산업이 발달하면서 전세계의 이야기가 시네마를 통해 전달됐다. 60년 전, 1960년대에는 TV가 그 역할을 했다. 지금은 인터넷 혁명이 시작됐다. TV가 영화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처럼 넷플릭스는 기존의 TV 콘텐츠와 영화를 보다 나은 방식으로 제공하는 연장의 의미가 될 것이다.” 11월 8일부터 9일까지 양일간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에서 열린 ‘넷플릭스 See What’s Next: Asia’는 리드 헤이스팅스 창립자 겸 CEO의 선언적인 말로 문을 열었다. 그가 넷플릭스로 촉발된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의 번성을 영화와 TV에 견준 것은 과대 해석이 아니다. 영화에서 TV로, 지상파에서 케이블TV로, 그리고 넷플릭스로 소비자가 넘어오는 과정은 거울처럼 닮았다. 사람들은 영화나 책보다 깊이가 떨어진다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TV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 TV플랫폼은 과연 시청자들이 돈을 더 내고 케이블 방송을 볼 것인가 100% 확신하지 못했지만 결국 케이블 채널은 퀄리티로 승부해 높은 수익을 올렸다. 이제 사람들은 매달 12달러를 지불하고 광고 없이 ‘몰아보기’가 가능한 넷플릭스를 본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 케이블 방송은 670만명의 가입자를 잃었고 아직 서비스를 이용 중인 사람들도 전보다는 TV 시청을 덜 한다. 시장조사업체 모펫네이던슨에 따르면 2015년 TV 시청시간은 전년 대비 3% 감소했고 그 수치의 50%는 넷플릭스와 관련 있다.
넷플릭스는 그 힘이 콘텐츠의 ‘다양성’에서 온다고 믿는다. 행사 기간 패널들이 가장 자주 쓴 표현 중 하나는 “미국이 아닌” 그리고 “강한 여성 캐릭터”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경영진 프레젠테이션 및 토크, 기자회견을 빼곡하게 진행한 프로그래밍도 그 일환이다. 아시아 11개국 200명 이상의 기자들은 매 시간 전혀 다른 콘텐츠를 만날 수 있었다. 가령 앤디 서키스 감독의 <모글리>는 인도가 배경이며 <나르코스: 멕시코>는 절반 이상 스페인어로 제작된 콘텐츠다.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지난 10년간 마블 코믹스, DC 코믹스가 해온 것처럼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슈퍼히어로물이고, 이번 행사의 최고 화제작인<킹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물이다. 이는 어떤 의무감이 아니라 온디맨드(공급 중심이 아니라 수요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이나 전략 등을 총칭하는 말) , 개인화, 그리고 글로벌 공유가 가능한 플랫폼에 가장 많은 이윤을 안겨주는 전략의 산물이다. 방송국과 달리 스트리밍 서비스는 광고가 붙지 않기 때문에 매회 시청자 수·시청률을 발표할 필요가 없고 경쟁상의 이유로도 이를 금한다(리드 헤이스팅스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수치를 발표하면 <HBO>에 어떤 쇼를 만들어야 할지 알려주는 셈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에서 55개 타이틀 개발 중
넷플릭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지, 그것이 가입자 수와 유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성공 여부를 측정”(미 금융 채널<CNBC>와 리드 헤이스팅스의 인터뷰)하고, 제작진은 다음 시즌 제작 여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콘텐츠의 성패를 인지한다. 때문에 창작자들은 시청률 추이를 걱정하는 대신 전체 흐름을 염두에 둔, 보다 파격적인 스토리텔링을 시도할 수 있다. 또한 전세계 1억3700만명 구독자의 시청 패턴을 분석하는 넷플릭스의 개인화 시스템은 저평가된 시장을 드러낸다. 테드 서랜도스 최고 콘텐츠 책임자는 2016년 ‘국제전자제품박람회’에서 “소비자들은 TV에 관한 한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쇼와 영화는 그들이 이해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 비즈니스 모델의 영향을 받는다”라며 진짜 사람들이 선호하는 상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넷플릭스가 올여름 6편의 자체 제작 로맨틱 코미디를 내놓은 것은 극장 영화 스튜디오에서 거의 외면당하던 장르의 충분한 수요를 파악한 결과다. 특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무려 전 세계 8천만명 이상이 시청한 성공작이 됐고 출연배우들은 일약 스타가 됐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었다면 3~4년 전에 이미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었을 것이다. 회원들의 시청 경향을 관찰하면서 배운 결과”라고 설명했다. 5년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랜드를 각인시킨 <하우스 오브 카드> 역시 “시청 데이터베이스 분석 결과 데이비드 핀처 감독과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을 맡은 정치 드라마를 회원들이 선호할 것”(<뉴욕타임스>와 테드 서랜도스의 인터뷰)이라는 결론이 나와 구입한 작품이다. 한편 글로벌 릴리즈는 ‘마이너’한 콘텐츠에도 투자할 요인을 제공한다. 특정 나라 안에서는 충분한 수요가 보장되지 않더라도 “매년 40% 이상 성장하는 6천만명 이상의 해외 이용자”(인도 유력 경제 신문 <이코노믹 타임스>)로 시야를 넓히면 잠재 소비자를 찾아낼 수 있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싱가포르 전직 기자가 만든 다큐멘터리 <셔커스>를 예로 들며, “모든 사람이 좋아할 영화는 아니지만 이렇게 특화된 콘텐츠는 아주 구체적인 시청자를 가져갈 수 있다”고 언급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기획은 2013년 처음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든 넷플릭스에 시장 분석과 시행착오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번에 넷플릭스가 아시아 지역에 포커스를 맞춘 행사를 기획하고, 특히 한국과 인도 매체에 공을 들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한국은 인구 대비 영화와 드라마의 소비량이 높고 인터넷상 버즈(인터넷 공간에 넘쳐나는 댓글) 확산도 빠르다. 때문에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전세계 최초 한국 개봉을 추진해 흥행의 바로미터로 삼기도 한다. 테드 서랜도스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인터넷 서비스가 발달해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접근성이 뛰어나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도 주목하고 있다”라며 한국 시장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리드 헤이스팅스는 “차세대 1억명의 구독자는 인도에서 올 것”이라고 누누이 매체를 통해 밝혔다. 2016년 1월 넷플릭스가 아시아 시장에 진출한 이후 인터넷 속도가 느린 인도의 특성을 감안해 다운로드 기능을 추가하기도 했다. 릴라이언스 지오의 4G 및 광대역 서비스가 출시되는 등 인도 내 인터넷 서비스가 빠르게 성장 중임을 감안하면 인도 가입자 수가 2017년 50만명에서 2020년 250만명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컨설팅 업체 ‘미디어 파트너스 아시아’(Media Partners Asia)의 예측도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다. ‘See What’s Next: Asia’는 인도 출신 배우 및 제작진과 새로 제작하는 오리지널 영화 8편과 드라마 시리즈 1편, 오리지널 시리즈 4편의 새로운 시즌을 공개하며 적극적인 투자를 예고했다. 이뿐만 아니라 미 경제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와 에릭 바맥 글로벌 콘텐츠 담당 부사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에서 무려 55개의 타이틀이 개발 중이다.
이 모든 것은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두루 사랑받으며 성공적인 안착을 도와줄 ‘킬링 콘텐츠’는 스타배우와 감독, 거대한 스케일을 필요로 할 때가 많다. 매달 8~14달러를 지불하는 1억3700만명의 가입자는 넷플릭스의 공격적인 초기 투자를 가능케 한 기반이다. <더 크라운> 시즌1의 총제작비는 1억파운드(1500억원. 회당 150억원)였고, 넷플릭스는 <매니악>의 조나 힐과 에마 스톤에게 회당 35만달러의 출연료를 지급했다. 하지만 회사 부채가 10억달러 선을 넘어서고 아마존·유튜브·애플 등도 오리지널 콘텐츠에 지출을 아끼지 않는 상황이 경쟁 과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스포츠 생중계나 라이브 뉴스에 관심이 없는 넷플릭스와 달리 아마존은 2017년 내셔널 풋볼 리그의 <서스데이 나이트 풋볼> 경기 패키지를 5천만달러 주고 구입하며 더 넓은 시장을 공략한다. 이에 리드 헤이스팅스는 <CNBC>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스타벅스라면, 아마존은 월마트다. 우리는 VOD 구독에 완전히 집중한다면, 아마존은 온갖 제품을 모두 판다”고 언급했다.
<HBO>의 실적 따라잡고 비평가들에도 호평
재정적 문제에 더해서 오리지널 콘텐츠 자체에 대한 걱정도 없지는 않다. 2016년 초 한국 론칭 때부터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같은 다양한 여성 서사와 화끈한 페미니즘 스탠드업 코미디에 열광했던 이들은 왜 이런 진보적인 플랫폼에서 중국 비하로 논란이 된 <YG전자> 같은 예능을 제작했느냐고 비판했는데, 이는 넷플릭스의 가장 좋은 면만을 생각하며 한국 콘텐츠만의 문제라고 오인한 결과다(다른 프로그램이 그랬듯 <YG전자> 역시 시청자 분석을 통해 기획된 쇼의 일부다. 테드 서랜도스는 기자회견에서 한국 예능 <범인은 바로 너!>와 <YG전자>의 반응이 나빴다는 기자의 말에 “내부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판단한다”고 답했다.-편집자).
넷플릭스는 창작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곳이며, 콘텐츠의 내용 면에서 완성도나 윤리성은 제작진 자율에 맡기고 있다. 때문에 논란도 필연적이다. 지난 8월 공개된 드라마 <채울 수 없는>은 뚱뚱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았던 주인공 패티가 다이어트에 성공한 후 학교 친구들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을 그린 하이틴 드라마인데, 넷플릭스가 비만 혐오적인 콘텐츠 제작을 취소해야 한다는 네티즌 청원이 올라와 수십만명이 동참했다. <USA 투데이>는 구글에서 청소년 자살 관련 검색 빈도를 19%나 높인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버젓이 방송하는 넷플릭스가 너무 위험하다고 말한다. 올 초 <가디언>에 실린 스튜어트 헤리티지의 비판은 좀더 세다. “1년에 700편의 오리지널 시리즈를 내놓는 넷플릭스의 작품을 모두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은 품질 컨트롤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나 <하우스 오브 카드>처럼 <HBO> 수준의 작품을 내놓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 넷플릭스가 만드는 영화들은 형편없지 않나. 그 결과 넷플릭스는 누구도 원치 않는 것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 공급자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이번 에미상에서 무려 23개 부문을 석권하며 드라마 명가 <HBO>의 실적을 발끝까지 따라잡았고,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와 코언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는 벌써 비평가들의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꼽히고 있다. 넷플릭스의 아낌없는 투자는 거장감독들이 마음껏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게 장려하고, 이는 매일 극장 수익이 공개되는 할리우드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전세계의 다양한 취향에 기반해 콘텐츠를 만드는 넷플릭스의 시스템은 ‘투자받는 작품’의 기준까지 바꾸고 있고, 진보적이고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도 하고, 논쟁적인 작품을 자유롭게 유통시키기도 한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60년 주기로 엔터테인먼트 역사를 설명했다. 이 거대 플랫폼이 가져올 향후 60년간의 그림이 사뭇 궁금하다.
넷플릭스 서비스 화면의 진화
넷플릭스는 시청자들이 매기는 ‘별점’이 실제 감상 여부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않고 성별, 나이, 지역도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대신 개개인의 시청 이력에 따라 2천개의 취향 클라스터를 구성한 다음 클라스터별로 어떤 타이틀이 인기 있는지 분석한 후 각자에게 맞는 40~50개의 콘텐츠를 노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우리가 넷플릭스 페이지에 접속했을 때 보게 되는 리스트는 자신이 속한 클라스터의 종류와 비율을 혼합한 결과물이다. 또한 콘텐츠의 대표 이미지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노출된다. 이 알고리즘은 최고 30%까지 시청 비율을 높였다. 한국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경우 주연배우 김태리가 총을 들고 있는 이미지의 선호도가 가장 높았지만, 사람에 따라 다른 이미지로 노출될 수 있다.
모바일 기술은 토드 옐린 제품 혁신 부문 부사장이 따로 섹션을 진행해 소개할 만큼 신경 쓰는 파트다. 그는 매달 휴대폰으로 넷플릭스를 보는 회원이 전체의 60%이며 휴대폰 화면의 특성이나 시청 습관, 데이터 사용량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 추천 이유를 알려주는 태그 노출, 프리뷰 영상을 어떤 식으로 몇초 동안 보여줘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은 지난 수년간 A/B 테스트를 거친 후 확정됐다. 지금과 같은 서비스를 체험하는 20만~30만명의 비교군 집단과 새로운 기능을 경험하는 20만~30만명의 대조군 집단을 비교하는 것이다. 자동 재생이 아닌 탭 기능을 통해 스냅챗 세대의 소비자들을 고려해 수직으로, 30초 길이로 프리뷰를 보여주는 형태는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다. 또한 버퍼링 없이 비디오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인코딩 방식을 개선시켜왔다. 모든 콘텐츠를 동일한 비트 레이트로 인코딩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월 4기가 데이터 요금제’ 기준 10시간 스트리밍할 수 있는데, 2018년 숏별로 인코딩을 달리한 시스템을 만든 후에는 26시간으로 늘어났다. 한 에피소드를 다 보고 난 후 자동으로 다음 에피소드를 볼 수 있는 ‘스마트 다운로드’ 기능도 지난 7월 론칭됐다. 카메론 존슨 제품 혁신 부문 책임자의 말을 빌리자면 “너는 보아라. 우리는 일을 한다”라고 요약 가능하다. 그렇게 더 빠른 ‘몰아보기’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