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원은 영화계에서 그 본명과 예명 홍설아·홍진아만큼이나 여러 일에 종사했다. 그는 스크립터로 출발해 조감독을 거쳐 시나리오작가, 작사가, 감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보인 충무로의 정통파였다. 두 예명에 ‘예쁠 아’(娥)를 넣을 만큼 그는 눈처럼 아름답고 참되게 살려고 했던 것일까. 실제로 스튜디오에선 언니로 통할 만큼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 중·후반 그는 전창근·유두연 감독, 허백년 평론가 등 영화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 나일구다방에 자주 나타났다. 명동에는 이 다방과 함께 김승호, 김동원, 장민호와 같은 배우들이 드나든 동방살롱 등이 있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에서 명동 방향 골목에 있던 예술인들의 찻집이었다. 충무로에 스타다방, 청맥다방과 같은 영화인들의 휴식 공간이 미처 생기기 전이었다. 아침에는 으레 날계란을 띄운 모닝커피가 나왔다.
경성으로 돌아와 영화 일을 시작하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창근 감독 일행과 한자리에 있던 한 여성이 담소 중에 크게 웃었다. 누군가가 야한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궁금해서 돌아보니 바로 홍은원이었다. 작고 가냘픈 몸매였지만 베레모를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작 그와 알고 지내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은연중에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직접 만나고 보니 활달하고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두 번째 감독 작품 <홀어머니>(1964)가 개봉된 시기였다.
홍은원은 명문가 출신이다. 구한말,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을 지낸 홍철주의 손녀로, 1922년 9월 24일 은행가인 홍우만의 2남2녀 중 둘째 딸로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교육자인 어머니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재동초등학교를 거쳐 경기고녀(경기고등여학교·현 경기여고)에 입학한 뒤에는 학과보다 오히려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광복 전 경기고녀를 졸업했으나 집안 형편이 나빠지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들어가게 된 것이 마루젠주식회사였다. 다행히 서적부 소속이라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1년3개월을 보내고 아버지를 따라 만주 신경의 반관반민의 직장으로 옮겼다. 1940년 초여름이었다. 그는 새 직장에서 합창단원으로 뽑히고 다시 1년 만에 신경음악단의 유일한 여성 가수가 된다. 그때 받은 월급이120원, 웬만한 봉급자의 배가 넘는 고액이었다.
조선영화사에서 음악을 담당한 친지를 졸라 최인규 감독을 소개받은 것은 여름휴가를 얻고 경성(서울)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최 감독은 그에게 <태양의 아이들>이라는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하고 싶은 역할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연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8·15 광복을 맞아 서울에 돌아온 것은 1946년 11월 초순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박계주 작가 일행을 따라 돈암동 최인규 감독 집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는 <자유만세>(1946)의 주인공인 전창근, 황려희와 감독을 꿈꾸는 박남옥도 와 있었다. 최 감독은 그에게 다음 작품인 <죄 없는 죄인>(1948)의 스크립터 일을 제의했다. 이때 그가 촬영현장에서 터득한 것이 영화제작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홍은원은 이 일이 끝나자 5살 아래인 극작가 이용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양가 부모의 반대 속에 이루어진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딸(이희재 숙명여대 교수, 박물관장 역임)을 낳고 4년8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1953년 초가을 그는 전쟁이 할퀴고 간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촬영기사 한형모였다. 그는 결혼에 실패한 후배를 위로하며 영화로 보람을 찾으라고 권유했다. 이에 힘입어 조정호 감독의 <여군>에 조감독 겸 스크립터로 들어가 현장 감각을 익히고, 잇따라 전창근 감독의<불사조의 언덕>(1955), <단종애사>(1956)와 이강천 감독의<백치 아다다>(1956), <사랑>(1957)의 스크립터 겸 조감독 일을 했다. 특히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 검은 머리 큰 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로 시작되는 그의 작사곡 <백치 아다다>(김동진 작곡)는 여주인공인 가수 나애심이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주목받았다.
<홀어머니> 촬영장에서의 홍은원 감독(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시나리오 집필을 이어가다
홍은원은 그사이 시나리오에도 손을 댔다. 신경균 감독의<유정무정>(1959)과 유두연 감독의<젊은 설계도>(1960) 등이 대표적인 예다. 영화계에 들어선 지 11년 만이다. 이후 시나리오작가 유두연의 콘티뉴이티 담당 수석 조감독으로 들어가 그의 감독 데뷔작 <조춘>(1959)과 <사랑의 십자가>(1959)를 완성시키고 윤봉춘 감독의 <여인천하>(1962), <애정 삼백년>(1962) 등에 참여하며 시대물을 익혔다. 그에게 메가폰을 잡을 기회가 온 것은 이 무렵이다. 1962년 4월 <사랑의 십자가>를 찍은 장환 기사가 원고 한 뭉치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어느 여성 판사의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여판사>(1962, 명보극장 개봉)였다. 뜻밖에 화폐개혁이 단행되는 악조건 속에서 어렵게 완성한 문정숙 주연의 <여판사>는 “여감독다운 섬세한 플롯의 전개에 명확한 커팅은 몇 사람의 중견감독을 조감독으로서 길러낸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새 영화 <여판사>”, <경향신문>)는 호평을 받았다. 이어 조미령 주연의 <홀어머니> (아세아극장)와 김지미 주연의<오해가 남긴 것>(1965)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 작품 이후 그에게 좀처럼 연출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홍은원은 환갑이 지나도 다람쥐처럼 영화계를 누비고 다닐 것”이라던 유두연의 예상과 달리 그는 스스로 표현했듯 “환갑은커녕 50살도 못 돼서”(“여류감독의 비애”, <세대> 1976년 1월호) 영화 현장에서 물러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다가 1999년 1월 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76살의 생애를 마쳤다. 37년 전인 1981년 늦은 봄, 첫 여감독과 함께 셋이 커피를 마시며 추억의 영화를 얘기하던 서울 서대문 근처의 다방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