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에서 유리병 속에 넣은 풍뎅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남자. 김지영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은 많지 않은 예산이어서 “전쟁의 잔재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위해 많은 장소들을 돌아다녔지만 하나의 톤으로 연결되지 않아 아쉬웠다”면서 “한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집중한 것도 그래서다”라고 말했다.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옷 속에 들어온 벌레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남자. 오염된 대기가 배경인 까닭에 등장인물 모두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다. 김지영 감독은 “원래 시나리오에는 건물 밖으로 나가는 외부 풍경도 있었는데 적절한 공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야기에 좀더 집중하기 위해 촬영 나흘 전 엔딩 신을 과감하게 바꿨다”고 말했다.
“맛있게 먹어주세요. (옆에 있던 아역배우에게도) 이건 맛있는 거야.” 김지영 감독이 주문하자 배우들이 음식을 맛깔나게 먹는다. “컷” 사인과 함께 감독과 배우들이 모니터를 확인하러 간 사이 대체 무슨 음식인지 궁금해 테이블 앞으로 갔다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접시에 가득 담긴 음식의 정체는 풍뎅이, 애벌레, 굼벵이, 귀뚜라미 등 온갖 곤충이었다. 옆에 있던 한 스탭이 “진짜 먹을 수 있는 벌레”라고 웃으며 귀띔해준다. 흰옷을 입은 채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난 이들이 대체 왜 벌레를 먹고 있는 걸까.
남자가 유리병에서 풍뎅이를 꺼내 가슴 앞 주머니에 주섬주섬 넣는다.
남자를 연기한 배우 김성훈은 수원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연극 <집>(2016), <바다 한가운데서>(2017)에서 주연을 맡았다.
지난 7월 11일 서울시 중랑구에 위치한 한 폐업 놀이공원의 폐건물은 근미래의 아포칼립스로 변모해 있었다. 벽 여기저기가 뜯기고 천장이 몰골을 앙상하게 드러낸 이곳에서 촬영하고 있는 단편영화 <벌레>는 전쟁, 환경오염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식량이 부족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한 남자가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만이 먹을 수 있는 고단백 음식 벌레를 우연히 얻게 되면서 어떻게 처리할지 갈등하는 이야기다. 총 2회차 만에 촬영을 끝내야 하는 단편영화인 까닭에 제작진은 식당에서 주인공 남자가 한 가족에게 벌레를 서빙하는 신, 남자가 자신의 옷 속에 뛰어든 풍뎅이를 먹을지 고민하는 신 등 여러 신들을 몰아서 찍었다. 김지영 감독은 “지금은 음식이든 뭐든 넘치는 시대이지 않나. 가축을 키워서 먹든, 공장에서 사육해서 먹든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평소 문제의식을 가지게 됐다”며 “이 문제제기와 더불어 대기오염으로 황폐한 세상을 그리고 싶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버리는 쓰레기들이 나비효과처럼 세상을 오염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벌레>를 구상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영화는 2회차 촬영을 마쳤고 후반작업에 돌입했다.
풍뎅이, 애벌레, 굼벵이, 귀뚜라미 등 친환경 식품인 식용 곤충들. 김지영 감독(오른쪽)은 “처음에는 살아 있는 곤충으로 설정하려고 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 후에 식용으로 나온 곤충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유충을 칼로 써는 장면도 있는데 미술감독이 초등학교 교재로 쓰이는 표본을 구해다가 그 안에 액을 넣어 여러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