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할당된 원고지가 10장 이내인 관계로, 필요한 몇몇 정보를 짧게 설명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정보 1) 난 외할머니가 계시다. 아직까지 건강하시다.

(정보 2) 외할머니랑은 다섯살 때부터 여덟살 때까지 같이 살았었다.

(정보 3) 외할머니랑 살던 시절, 옆집엔 인종이란 동갑 친구가 살았었고, 양 집안간엔 잦은 왕래가 있었다. 그래서 인종이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날 어떻게 키우셨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다.

할머니가 나한테 뭘 해주셨더라?

난 가끔씩 인종이 집엘 놀러 간다. 그때마다 인종이 어머니는 날 반갑게 맞이해주시고는, 인종이가 여자친구가 없다면서 걱정걱정을 하시다가, 5만원 상당의 팔뚝만한 굴비를 구워주신다. 그리고는 내 외할머니께서 건강하신지 안부를 물으신다. “너 니네 외할머니께 잘 해 드려야 된다. 너한테 정말 잘 해주셨다.”

솔직히 난 외할머니께서 나한테 뭘 얼마나 잘 해주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기껏 기억하고 있는 건, 엄마한테 왜 등을 안 긁어주냐고 신경질을 부릴 때마다 할머니는 대신해서 등을 긁어주셨다는 거… 귀를 자주 파주셨다는 거… 그리고 놀이터에서 ‘뺑뺑이’를 타다가 고개가 우연히 뒤로 젖혀진 일이 있었는데, 다시 재낄 힘이 없어서 젖혀진 상태로 30바퀴 이상을 돌고 있을 때 뺑뺑이를 멈춰 주신 거… 그리고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나에게 환타를 사주신 것…. 굳이 한 가지 더 기억해내자면, 어느 날 만화책 몇권을 얻어다 주셨다는 거…. ‘날으는 자동차’ 외의 시시껄렁한 책들을….

영화를 보는 내내 난 내가 외할머니께 알게 모르게 쓴 돈이 얼마나 되나 조목조목 계산을 해봤다. 귀가 잘 안 들리신다길래 보청기를 해드렸다. 최신식 디지털 보청기를 사는데 한 쪽에 270만원씩 들었다. 외할머니께서 집을 옮기셔야 한다길래 부족한 보증금을 대신 내 드렸다. 300만원인가 500만원인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 외에 잡비들은 수시로 든다. 용돈 가끔, 생신 잔치비로 일년에 한번, 건당 기십만원씩 든다. 일본 온천에나 보내 드릴 심산으로 기백만원을 모았고 또 할머니가 더 연로해지시면 종합병원이 가까운 광화문 근처 20평대 아파트를 마련해드리고 싶다. 어림잡아 봐도 기천에서 억이 넘어가는 돈을 왜 난 할머니를 위해 쓰고 싶은 걸까? 안 그래도 돈 쓸 데가 천진데 말이다.

난 왜 할머니한테 억대 돈을 쓰고 싶을까?

영화가 끝날 때쯤 난 손쉽게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인종이 어머니 말씀대로 난 외할머니로부터 기천에서 억에 이르는 은혜를 받은 것이었다. 내 머린 도저히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외할머니의 수많은 은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등이 가렵다고 신경질을 부리는 당신의 등을 긁어주신 덕에 당신은 온전한 심성을 갖게 되었고, 다행히 귀를 자주 파주신 덕에 당신은 각종 잡균으로부터 당신 몸을 보호할 수 있었고, 심지어 뺑뺑이를 타다가 객사할 뻔한 당신을 환타로 살려주셨으며, 결정적으로 몇몇권의 만화책을 갖다주신 덕에 당신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고 작가가 된 게 아니냐고….

“흠….”

상우가 진짜 상우라면… 그래서 그 녀석이 할머니한테 받은 추억이랑 사랑을 돈으로 갚자면 그 녀석은 이제 죽은 거나 다름없다. 내가 얼추 계산해봐도 상우 녀석은 2만마리 이상의 닭을 기르는 양계장을 할머니에게 사드려야 한다. 김의찬/ 방송작가. <순풍산부인과><왠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액자` 속의 외할머니

▶ 마침내 망막에 남은,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이여!

▶ 상우는 반드시 큰 돈을 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