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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시상식⑦] 현재의 미국 사회가 낳은 수작 <쓰리 빌보드>
이주현 2018-03-05

트럼프가 미국영화 수준을 높여놨구나

마틴 맥도나 감독은 아일랜드 부모의 피를 물려받은 아일랜드인이자 런던에서 태어난 영국인이다. 극작가 출신의 그는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를 거쳐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그런 맥도나 감독이 그려낸 미국에는 온갖 사이코와 차별주의자들이 넘쳐난다. 미국 LA를 배경으로 한 두 번째 영화 <세븐 싸이코패스>(2012)에선 강아지 납치범, 강아지에 집착하는 갱단의 두목, 연쇄살인마 사이코와 알코올중독 시나리오작가가 등장했고, 미국 중부 미주리 주의 가상 소도시 에빙을 배경으로 한 <쓰리 빌보드>에선 인종 차별주의자가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벨기에의 브뤼주를 배경으로 한 장편 데뷔작 <킬러들의 도시>(2008)의 주인공 역시 차별적 발언을 일삼는 영국 백인 킬러였는데, 차별과 편견, 무지와 폭력은 마틴 맥도나가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온 관심사다. 차별적 발언과 행태, 무자비한 폭력을 활용한 마틴 맥도나의 블랙코미디는 언제나 영화 곳곳에 양념처럼 뿌려져 있다.

미국 사회의 갈등과 분노를 담다

<쓰리 빌보드>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분노를 겨냥한 영화다. 이야기는 딸을 잃은 엄마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가 한적한 외곽 도로에 세워진 세개의 광고판에 도발적 광고 문구를 실으면서 시작된다. “죽어가는 동안에도 강간을 당했다.” “그런데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윌러비 서장?” 밀드레드의 예상대로 이 세 문장은 즉각 효력을 발휘한다. 딸이 죽은 지 7개월이 넘도록 수사는 진전을 보이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지목되자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주민들 역시 밀드레드와 경찰이 치르게 될 ‘전쟁’에 주목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건 여전히 여성은 수시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은 공공연히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핵심에 경찰 딕슨(샘 록웰)이 있다. 윌러비 서장을 존경하는 딕슨은 그런 차별을 죄책감 없이 행하는 인물이다. 마틴 맥도나가 종종 영화에 소환하는 ‘멍청한 백인’의 극단적 예라고 할 수 있는 딕슨은 질서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흑인(만)을 고문하는 게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존경하는 윌러비 서장을 힘들게 만든 사람은 밀드레드라는 백인 여성이고, 밀드레드를 도와 광고를 실은 광고회사의 젊은 사장은 백인 남성인데, 만약 이들이 백인이 아니었다면 딕슨은 절차를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무장한 백인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흑인을 폭행하고 총격을 가해 사살하는 사건은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인 2016년 미국 루이지애나에서도 벌어졌던 일이다. 에빙시의 경찰서엔 인종 차별주의자 아니면 동성애 혐오자뿐이라는 말은 그저 농담이 아니다. 차별과 폭력은 너무도 가까이서 자행되고 있다. 윌러비 서장의 후임으로 흑인 경찰서장이 부임했을 때에 차별과 편견의 작동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흑인 서장이 백인 경찰에게 이름을 대라고 하자 백인 경찰은 명찰의 이름도 못 읽냐고 말한다. 그러면 ‘못 보냐’가 아니라 ‘못 읽냐’라는 말에 담긴 ‘흑인은 무식하다’는 편견을 흑인 서장이 지적한다. 편견과 차별과 폭력은 이처럼 만연해 있다.

밀드레드가 싸워야 할 대상은 딸의 강간 살인범을 잡지 못한 경찰 집단이 아니다. 밀드레드가 상대해야 하는 건 차별이 만연한 사회, 오랜 갈등으로 분열된 사회, 인종 차별주의자들을 두둔하는 대통령을 뽑은 미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다. 영화에는 대규모 화재 신이 두번 등장하는데, 그 두번의 화재 신이 비추는 것도 결국은 갈등과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 미국의 모습이다. 경찰서가 불타고 광고판이 불탄다. 경찰서가 불에 탈 땐 경찰서에 걸린 성조기도 함께 탄다. 흥미로운 건 밀드레드가 화염병도 던지고 소화기도 든다는 것이다. “밀드레드에겐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화염병을 던지는 게 더 쉬운 일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말처럼, 밀드레드는 스스로를 투쟁의 복판으로 밀어넣는다. 우는 대신 행동한다. 원망하는 대신 행동하고 자책하는 대신 행동한다. 딸을 잃은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거다. 그 행동을 지지하는 이들은 밀드레드를 좋아하는 키 작은 소인(피터 딘클리지)이거나, ‘경찰은 싫어’, ‘백인들은 멍청해’라고 말하는 멕시코인 혹은 흑인이다.

반성과 화해를 향하여

마틴 맥도나 감독이 의도적으로 백인 캐릭터를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이유는 그들의 무지와 무책임을 일깨우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인다. 마틴 맥도나의 영화에선 그 어떤 사이코와 킬러도 구원받지 못할 사악한 인간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조금 무지하고 무례할지언정 반성할 줄 안다. <쓰리 빌보드>에서 딕슨도 마찬가지다. 딕슨이 경멸받아 마땅한 인물에만 머물렀다면 <쓰리 빌보드>는 지금과 다른 영화가 됐을 것이다. “경찰이 되려면 사랑이 필요하지, 총과 증오로는 해결하지 못해”라는 윌러비 서장의 편지. “우리는 적이 아니”라는 흑인 서장의 말. “희망보다 노력이 중요하기에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딕슨의 다짐 같은 고백. 이 모든 말들이 희망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보게 한다. 증오와 분노가 더 큰 증오와 분노를 야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쓰리 빌보드>를 보고 나서 누군가가 말했다. 트럼프가 미국영화의 수준을 한껏 올려놓았다고. 흑백 갈등이 심각하게 불거지고 민주주의가 크게 위협받자 도리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영화들이 많아졌다. <쓰리 빌보드>가 무언가를 주장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들려주는 목소리가 있다면 그건 반성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다.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며 역사가 쓰여졌듯이, 밀드레드와 딕슨도 증오와 분노를 동력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쓰리 빌보드> 이전에도 마틴 맥도나 감독은 천재 소리를 들었다. <쓰리 빌보드>에 이르면 그 찬사는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올해 영국 아카데미는 <쓰리 빌보드>에 작품상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에 많은 이들이 공명하고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어쩌면 지금의 시대가 절망과 분노로 가득한 시대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시궁창 속에서 유머를 잊지 않고 반성과 화해로 나아가는 마틴 맥도나의 화법은 꼭 희망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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