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은퇴한 피겨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 했다. 가족의 학대 속에서 유년 시절을 힘겹게 버텨낸 그녀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고, 끔찍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 빙상계에서 영원히 퇴출당했다. <아이, 토냐>는 무엇이 그녀를 ‘악녀’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은 토냐 하딩의 일생의 반항심과 용기, 혼란과 희열을 표현하기 위해 모큐멘터리와 블랙코미디 장르를 뒤섞고 종종 제4의 벽까지 허무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선보인다. <아이, 토냐>와 토냐 하딩의 삶을 함께 곱씹으며 그녀의 인생에 “좀더 복잡한 내막이 있었다는 것”을, “단지 악당, 악역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을” 슬쩍 들여다보자.
1994년 1월 6일, 토냐 하딩(왼쪽)은 올림픽 출전권을 두고 겨루던 라이벌 낸시 케리건에 상해를 입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3년의 집행유예와 500시간의 사회봉사, 10만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선수 생활의 시작
1970년생인 토냐 하딩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이스트 포틀랜드에서 자랐다. 엄마 손에 이끌려 4살 때부터 스케이트를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다이앤 롤린슨 코치를 만나 본격적으로 피겨스케이팅 훈련을 한다. 영화에서는 무려 6개월 만에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 정도로 또래 아이들의 실력을 뛰어넘기 시작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웨이트리스 생활을 하며 그녀를 뒷바라지했던 엄마의 지독한 사랑(이라 쓰고 학대라 읽는 유년 시절의 경험)이 묘사되는 장면들은 보기가 괴로울 정도다. 그녀의 실제 증언에 따르면 물리적 폭력을 7살 무렵부터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다고 한다. 그녀가 겪은 폭력은 2008년 출간된 자서전 <토냐 테이프>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엄마인 라보나 골든은 자서전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학교이자 집이자 친구였던 빙판 위에서 그녀는 짧지만 화려하고 또 악명 높았던 선수 생활을 하게 된다.
1986년 미국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6위를 차지하며 자국 내 경기에서 먼저 실력을 선보인 하딩은 1989년 열린 ISU 피겨 그랑프리 시리즈 스케이트 아메리카대회 여자싱글부문에서 1위를 차지해 국제대회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1년 대회의 여자싱글부문에서 미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며 1위를 한다. 같은해 세계선수권대회에 처음 도전한 그녀는 이때 다시 한번 멋진 트리플 악셀을 보여준다. 그 해 ISU 피겨 그랑프리 시리즈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는 더 많은 기록을 세운다. 하딩은 쇼트 프로그램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선수, 싱글부문에서 처음으로 두번의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선수, 트리플 악셀과 더블 토 룹으로 이어지는 콤비네이션 점프를 처음으로 선보인 선수로 기록됐다. 이쯤 되니 미국 빙상계는 그녀를 공식적인 미국 피겨스케이팅계의 여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릴레함메르동계올림픽에서 토냐 하딩은 경기 도중 스케이트 끈이 풀렸음을 심사위원에게 어필하며 재경기를 요청했다. 이 장면은 <아이, 토냐>에서 완벽하게 재현된다.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
1989년에서 1991년 정도까지가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토냐 하딩은 자신의 기량이 절정에 달했을 이 시기에 연인이었던 제프 길롤리와 결혼식을 올린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남자와 결혼도 하고 경기에서 좋은 성적도 보여줄 것만 같았던 하딩의 행복한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결혼 이후 제대로 훈련을 하지 않으면서 무분별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화려했던 미국 최고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경력의 파괴의 끝은 전남편 제프 길롤리와 멍청해 보이는 그의 친구 숀 화이트 두 사람이 가담해 벌인 라이벌 선수 낸시 케리건에 대한 폭행사건이었다. 1994년 1월 6일, 약간의 과대망상에 빠져 있던 숀 화이트는 사람들을 사주해 릴레함메르올림픽 출전권을 두고 하딩과 겨루기로 되어 있던 낸시 케리건을 찾아가 무릎에 상해를 입히는 범죄를 저지른다. 하딩은 이 사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3년의 집행유예, 500시간의 사회봉사, 10만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미디어에서는 가해자인 토냐 하딩쪽을 악당으로, 낸시 케리건을 천사 같은 희생양으로 다뤘다. 당시 하딩은 전남편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했는데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녀는 제프 길롤리가 연루된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가 총을 들이대며 자신을 협박했다고 고백했다. 하딩은 과거의 자신을 둘러싼 진실이 “부끄럽고 두려웠다”고 말했다.
온갖 불화와 구설에도 불구하고 토냐 하딩의 1등을 향한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출전하게 된 1994년 노르웨이에서 개최된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경기에서 그녀는 경기 도중 스케이트 끈이 풀렸다며 심사위원들에게 재경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이 경기에서 그녀의 성적은 8위에 그쳤다. 영화는 실제 그녀의 경기와 거의 흡사하게 이 장면을 묘사해낸다. 스케이트장에서만큼은 1등이고 싶은 미친 재능의 소유자였던 토냐 하딩을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당시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스케이팅은 토냐 하딩 덕분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주목받는 경기로 기록되고 있다. 영화는 이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경기 장면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트리플 악셀을 선보이는 장면의 경우에는 마땅한 대역을 찾지 못해 CG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재미있게도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은 올림픽 당시 낸시 케리건과 캠벨수프 광고 작업을 같이한 적 있다. 그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토냐의 성장 환경과 그녀가 삶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두번의 동계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 집중하고 인내했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레슬링에 이어 권투까지
폭행사건과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이후 그녀는 법적으로 영원히 빙상장을 찾을 수 없게 됐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는 올림픽이 끝난 직후 자신의 집 인근 공원에서 괴한에게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토냐 하딩을 좌절시키지 못했다. 낸시 케리건의 일대기를 영화화하려던 한 영화사는 계획을 틀어 토냐 하딩을 주인공으로 TV영화를 제작하기로 한다. 디즈니사는 낸시 케리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고 두 영화는 방송에서도 경쟁을 했다. 일본 여자프로레슬링협회도 하딩에게 스카우트 조건으로 계약금 200만달러에 연봉 38만달러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 후 실제 프로레슬러로 경기를 뛰기도 했던 하딩은 2003년 프로 복서로 전향해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금도 토냐 하딩은 엄마와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고 한다. 훗날 하딩은 “나는 엄마가 어릴 때 내게 저질렀던 모든 행동을 용서한다. 나는 괜찮다. 나는 정말 괜찮다”라고 말했다. 영화의 결말과 별개로 알고 봐도 크게 지장이 없을 토냐 하딩의 실제 근황은 이 사진 한장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그녀는 <아이, 토냐>의 시사회에 참석해 마고 로비와 포토존에 섰다.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라. 영화가 그녀에 관한 무엇을 보여줬든, 지금의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