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유명감독들의 데뷔 전 작품을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일찌감치 발휘된 재능을 확인하는 즐거움일 수도 있고, 보기 민망한 습작에도 불구하고 연륜이 쌓이고 시스템이 받쳐주면 작품 수준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는 ‘안도의 즐거움’일 수도 있다. 이번주 KBS독립영화관(KBS2TV, 토, 새벽 1시10분)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최근의 화제작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든 박찬욱 감독의 <심판>(35밀리, 컬러 26분)이 눈길을 끈다. 배경은 사체 안치실이다. 그곳에는 백화점 붕괴사건 뒤 뒤늦게 발견된 여자 사체의 보상금 때문에 서로가 친연을 주장하는 아귀다툼이 있다. 친고를 주장하는 한 부부와 갑자기 자기 딸이라고 주장하는 염사 그리고 이를 중재하는 담당 공무원과 뉴스를 만들기에 혈안이 된 방송기자 등이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짧은 시간에 주제를 전달해야만 하는 단편에서는 영화 관습의 파괴조차 자주 용인될 뿐 아니라 오히려 권장되기도 한다. 그래서 연극적 상황과 비현실적인 심리의 전개도 묵인된다. 그들은 서로 싸우지만, 정작 확인할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절단된 상태다. 여기에 반전이 일어나고 여태까지 흑백으로 처리되었던 화면은 컬러로 바뀌면서 그 장엄하면서도 우스꽝스런 ‘심판’이 내려진다. 이 영화가 ‘확인의 즐거움’을 줄 것인지, ‘안도의 즐거움’을 줄 것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