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퍽 가난하게 자랐다.
70년대 중반까지 서울시내에서 가장 빈민촌이랄 수 있었던 청계천 판자촌이 내 유년의 고향이었다. 학우들이 가져온 불우이웃돕기 쌀봉투는 대체로 내 차지였고 장마철이 지나고 나면 아버지 도장을 가지고 마장동의 적십자회관에 밀가루와 헌옷들을 배급받으러 가기도 했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벌기 위해서 부모님들께서는 매일 일하러 가셨는데 언제 나가셔서 언제 돌아오시는지 우리는 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부모님들께서 먹거리와 육성회비와 집세를 마련하러 나간 사이, 초등학교 6학년 정도밖에 안 된 큰누나는 소녀가장이 되어서 어린 동생 셋을 돌보았다. 밥을 짓고 집안 청소를 분담시키고 숙제들을 점검하고 따끔하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 딸들은 훨씬 빨리 어른이 된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던가, 동생들에게는 만화책을 빌려서 보게 하고 큰누나는 커다란 고무통에 빨래를 잔뜩 담궈놓고 발로 밟아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창문으로 엄청난 불길이 들이닥쳤다. 어디선가 불이 난 것이었다. 판자촌은 순식간에 불길이 옮겨붙기 때문에 우리가 불이 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불길이 상당히 커진 이후였었다. 어른 한명 빠져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이 아수라장인데 큰누나는 그 틈으로 우리들을 필사적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이미 불길에 휩싸인 집으로 세간살이들을 건지러 무려 세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 조그만 여자아이는 한번에 한 가지씩밖에 가져올 수 없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 어린 여자아이가 목숨을 걸고 불길 속에서 건져온 것 세 가지는 무엇이었을까?
첫번째는 파란색 플라스틱(그때는 빠께쓰라고 불리우던) 쌀통이었다. 쌀! 그것은 한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쌀통이었다. 그 다음에는 커다란 라디오였다. 그것은 우리집의 유일한 전자제품이었다. 그리고 세번째 최후의 선택으로 구해낸 것은 벽걸이 괘종시계였다. 이것이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화염에 휩싸여가는 아수라장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판단한 세 가지였다.
여자아이들이란 대체로 예쁜 옷과 머리핀과 책가방과 일기장과 또 비밀스런 몇 가지들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지만, 절체절명의 다급한 순간에 드러난 속마음은 어이없게도 쌀과 라디오와 괘종시계였다. 지금 어른이 된 나는 만약 불이 난 나의 집에서 세번의 기회를 가지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초등학생 6학년짜리 아이보다 단호하고 명쾌하게 선택할 자신이 없다. 그렇게 ‘어른스러운 마음이 드러나는 선택’을 할 자신이 없다.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어른들 몰래 어른이 된다. 부모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아이들끼리 방치된 시간들은 어른들이 모르는, 아이들만의 가치관과 신념으로 꾸려진다. 아이들은 괜스레 슬퍼하거나 뜬금없이 신세한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생활이 불편한 아이는 있어도 삶이 불행한 아이는 없다. 그렇다. 가난은 불편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은 어른들의 몫이다. 가난으로 슬프고 서럽고 고달프고 한스러운 모든 일들은 어른들의 세계이다. 가난으로 불행한 것은 어른들의 슬픔이다.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집안의 빨래를 해야 하는 고단함 속에서도 비누방울 놀이를 하는, 찰나의 행복을 놓치지 않는다. 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http://www.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