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피 속의 혈투>는 그런 고민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치열한 현안을 제시한다. 제약업계의 이익에 봉사하는 시스템에 의해 의약품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1996년 이후 저가의 에이즈 의약품이 아프리카 및 남반부에 공급되는 걸 조직적으로 막고 있는 서양 제약회사들과 정부의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천만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맞았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죽어가는 현실 앞에서 인도의 딜런 모한 그레이 감독은 주저 없이 카메라를 들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국경없는영화제2017에 <피 속의 혈투>를 들고 방한한 그는 할 말이 무척 많아 보였다. 짧은 질문에도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오는 말과 생각들. 논리정연하게 열변을 토하는 그의 모습은 세상을 향한 증언처럼 보였다. 아직 알려야 할 사실, 알아야 할 진실들이 너무 많다.
-국경없는영화제2017의 초청작으로 방한했다.
=국경없는의사회와는 오랜 파트너다. <피 속의 혈투>를 시작한 이후 의약품 접근성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조언을 들었다. 의약품 이슈에 관심을 가진 단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함께해왔다.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서 밝히는 것처럼 지금도 약이 없어서 치료가 가능한 질병인데도 사망하는 사람이 한달에 150만명이 넘는다. 사람들이 이렇게 중요한 이슈에 관심이 없다는 게 놀라운 뿐이다. 내가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원래 다큐멘터리 전공이 아니라고 들었다.
=원래는 픽션영화에서 제작 기술 지원을 주로 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에이즈 상황에 대한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나름 여러 분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그때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볼까 하는 마음에 주변에 조언을 구했는데 다들 너무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고 말렸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다. 그러다 2007년 6월 어느 날 아침, 더이상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벼락처럼 뇌리를 스쳤다. 당장 그날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다큐 제작에 들어갔다. 그렇게 5년 반가량 여기에 매진했다.
-그날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본래 전공은 역사학이다. 역사학 연구를 하다보면 사실 정보가 사라져 상황을 추측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자주 맞닥뜨린다. 아프리카의 에이즈와 의약품 접근성 문제에 관한 정보도 빠른 속도로 소실되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점점 잊혀져 결국엔 소수의 전문가들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떨어지듯 시간이 흘러갈수록 정보들이 사라져간다는 긴박감에 사로잡혔다. 이건 모두가 알아야 할 ‘세기의 범죄’다(사건이 아닌 범죄, 그는 유독 이 표현을 강조했다). 대개 다큐멘터리의 방향을 두 가지 형식으로 정한다. 하나는 스토리, 다른 하나는 이슈에 관한 설득이다. 의약품 접근성 문제는 단지 한편의 다큐멘터리로 그칠 사안이 아니다. 다큐멘터리야 제작해서 개봉하면 끝이지만 이건 개봉부터 끝나지 않을 전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주요 무대로 4대륙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아프리카인들이지만 원인은 북미와 유럽쪽에서 발생한다.
=살릴 수 있었지만 죽어간 이들이 수백만, 아니 천만명이 넘는다. 아프리카의 비극에 대한 외신의 태도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건 그 나라의 문제’라는 식이다. 불행한 나라와 운이 없는 사람들. 그럴 리가 있나! 이건 서구 의료업계가 시행한 정책상의 결과다. 제약회사들은 연구 개발이나 시장 경제에 의한 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정치를 한다. 적극적인 로비와 담합으로 카르텔을 형성하고 독과점 시장에서 이익을 뽑아낸다. 그들은 사업이라 말하지만 이건 제대로 된 사업도 아니다. 일례로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경우 의약품이 제대로 수급되지 않아 평균 연령이 66살에서 27살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내가 다큐멘터리를 시작할 단계만 해도 아무도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아프리카의 비극을 전시하고 싶지 않았다. 이 끔찍한 결과가 있기까지 여러 숨은 의도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데즈먼드 투투 신부,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인터뷰한 사람들의 면면이 인상적이다. 섭외가 쉽지 않았을 텐데.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터뷰로 연결된다. 처음에 지인의 소개로 파미드 박사를 만났고 이후 그가 추천해줘서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안이었기 때문인지 대부분이 흔쾌히 응해줬다. 현지조사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시작한 게 다행이었다. 그곳에서 투투 신부와 시민운동가, 의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국경없는의사회도 거기서 알게 됐다. 이렇게 쌓인 정보를 가지고 소위 거물들과의 접촉을 늘려갔다. 가령 빌 클린턴의 섭외에는 1년 반이 걸렸다. 그들은 자신이 화제의 중심에 놓일 것이란 비전이 있을 때 엉덩이를 뗀다. 빌 클린턴이 응답했을 때 <피 속의 혈투>가 앞으로 의약품 문제에 관한 중요한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정말 필요했지만 제일 어려웠던 건 제약업계 관계자들이었다. 내부적인 이야기가 필요했지만 철저히 비공개였다. 퇴사할 때 함구하겠다는 계약서를 쓰고 나온다고 들었다. 그들에게 모든 걸 포기하고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피 속의 혈투’라는 제목은 강하고 직설적이다. 처음부터 생각했던 제목인가.
=아니다. 제목을 정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5년 반 동안 찍었기 때문에 찍는 동안에도 인터뷰 대상자의 범위가 계속 바뀌고 방향도 끊임없이 바뀌었다. 에이즈는 다른 병에 비해 외적으로 충격적이다. 한편 젊은 사람들에게 발병하기 때문에 제약업계 입장에서는 고수익을 창출하는 병이기도 하다. 에이즈라는 병 자체보다는 세계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짚어보고 싶었다. 이를 상품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과 이에 맞서는 사람들,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피 속의 혈투는 그야말로 세계의 형태에 대한 나름의 표현이다. 물론 인도 내부의 일도 급한데 왜 굳이 아프리카 이야기를 하느냐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의무는 새로운 흐름을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현재 의약품 접근성 문제는 특정 단체에 책임을 묻기 힘들 정도로 복합적이다. 이건 거대한 흐름이고 모두가 자의 반 타의 반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 방향을 설정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때문에 여기에 균열을 낼 새로운 생각, 방향,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논쟁을 피하고 싶지 않다. 아니, 오히려 반갑다.
-<피 속의 혈투>는 우리가 몰랐던 세계의 또 다른 얼굴을 전한다. 물론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다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인도의 경우 의약품 시장 경쟁이 치열해서 상대적으로 약값이 싸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현실을 이야기하면 다들 믿을 수 없어 한다. 하지만 최근 인도 역시 북미와 유럽 제약회사들의 압박으로 새로운 암치료제의 가격이 매우 비싸졌다. 다시 말해 남의 일이 아니란 말이다. 현재 세계 제약시장은 수요와 공급 법칙에 의해 운용되지 않는다. 공공의 이익보다 고수익을 낼 수 있는 방향으로 몇몇 소수 정치세력에 의해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싸워야 한다. 활동가는 전면에서 싸우고, 언론은 지금 이 자리처럼 이를 알리고, 나머지는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야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한국은 최근 촛불혁명으로 유례없는 에너지를 보여줬다. 분명 그 에너지들이 좋은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제가 끝나도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으니 주변에 널리 알려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