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동 나우필름 대표는 감투보다 한량에 가까운 체질이다. 해만 지면 마른 멸치를 안주 삼아 혼자서 맥주 한잔하는 게 삶의 낙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신임 영진위원과 부위원장을 맡은 것을 두고 영화계에서 “준비된 영진위원”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건 제작자로서 평소 스크린 독과점, 수직계열화, 불공정거래 등 영화산업의 각종 현안과 관련한 사안에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일 거다. 신임 영진위원장이 선임되기 전까지 위원장 직무대행까지 맡아 일주일에 한두번 서울과 부산을 오가고 있어서인지 그의 얼굴은 다소 야위어 보였다. 그는 신임 위원장이 선임되기 전이라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와 관련한 영진위의 협조 의지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는 기자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업무 파악은 잘되고 있나.
=원래 부위원장은 상임이 아닌데 위원장이 공석이라 어쩔 수 없이 상임처럼 업무를 파악하고 결재를 해야 한다. 전부 파악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대강의 맥락은 짐작했다.
-‘텃밭을 열심히 고르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던데.
=내가 정치할 것도 아닌데 무슨 텃밭을 고르긴 골라? 그런 표현 하나도 재미없다.
-위원장이 선임되기 전에 업무를 열심히 파악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지난 9년 동안 영진위가 문제가 많았음에도 영진위원 임명이 늦어져 영화계가 걱정이 많았다. 가령, 한민구가 지금까지 국방부 장관을 맡고 있다고 상상을 해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영진위는 정확히 지난 10월 23일까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신임 영진위원들이 10월 24일 임명됐으니까. 블랙리스트 실행 문제, 지난 정권에서 문제가 됐던 가족영화제작지원사업 등을 철저히 조사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신임 위원장이 선임되고 나서 그 일을 시작하면 그동안의 시간이 너무 아깝다.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려고 하고,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진 자료인지 직원들에게 자꾸 물어보게 되니 깐깐하다거나 꼼꼼하다는 소리가 들릴 수는 있겠다. 그럼에도 영진위가 지난 9년 동안 영화계와 단절됐고, 어떤 배경 속에서 일을 해왔는지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조직을 들여다봐야 하니 자료 이면의 맥락을 짚어내고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일부 본부장들이 불편해하거나 불안해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던데.
=불편해하고 불안해할 필요가 뭐가 있나. 영진위가 정책 방향을 제대로 다시 잡게 되면 그 방향에 맞춰 조직이 리셋되어야 한다는 건 영진위 내부든, 영화계든 모두 동의하는 부분이다. 조직은 크게 한번 개편되겠지. 그건 영진위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고, 넓게 보면 한국 영화산업을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영진위에 가서 자주 하는 얘기가 영진위는 조직 밖에 영화계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기구라는 거다. 영진위와 영화계가 쇼트트랙처럼 아주 정교하게 합을 맞추기까지는 어렵더라도, 이인삼각처럼 발을 맞춰가야 하는 상황이다. 사안에 따라 영진위가 끌면 영화계가 밀어주고, 영화계가 끌면 영진위가 밀어주는 방식으로 발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영화계가 앞으로 나가려고 하면 영진위가 뒤통수를 잡아서 영화계가 ‘좀 놔줘’ 하는 모양새였다.
-영진위는 지난 9년간 ‘이명박근혜’ 정권의 대표적인 블랙리스트 실행 기구였다. 다른 공기관이 그렇듯이 영진위 또한 적폐청산 작업을 피해가기 어려운데.
=왜 피해, 가장 앞장서서 적폐를 청산해야지. 적폐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과정을 살펴 문제가 된 부분은 조치를 해야지.
-블랙리스트의 가장 큰 피해자가 독립영화계였다. 완전히 무너진 생태계를 어떤 방식으로 복원시킬 건가.
=겨우 보름 정도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 한 입장으로서, 9인위원회의 1인으로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 건 적절치 않다. 다만, 영화계 전체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있다. 독립영화 제작환경과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배급환경이 무너진 상태다. 상업영화 펀딩의 경우, 천장이 없는 대작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중간 규모급 영화들은 거의 펀딩이 안 된다. 그런 문제들을 두고 영화계 전체와 영화계를 대표하는 영진위원들이 토론을 거쳐 방향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당장 지금 어떻게 하겠다고 얘기하는 건 주제넘고, 적절하지 않지만 좋은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이하 진상조사위)에서 모태펀드 블랙리스트를 포함해 영화계 블랙리스트의 진상을 조사하고 있는데, 영진위 직원들의 적극적인 내부증언과 협조가 필요해 보인다.
=그 부분은 내가 얘기하겠다. 최근 영진위 각 부서에 블랙리스트건과 관련한 자료를 정리해 넘겨달라고 주문했다.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 하고, 직무대행으로서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된 사실 관계를 빨리 밝혀서 진상조사위와 공유할 거다. 우리 내부적으로 진상조사위보다 더 많은 내용을 파악해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할 계획이다. 개선 방향을 마련하고, 재발 방지 시스템을 제도화하는 작업은 9인위원회에서 논의하면 되겠지만, 그 내용을 파악하는 건 내 역할이다.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는 내게 주어진 권한과 범위 안에서 확실히 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우리, 성질 좀 있잖아. (웃음)
-현재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내년 예산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재원이 가장 중요하다. 영화발전기금의 주요 재원은 정부의 출연금과 영화상영관 입장권의 3%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정부의 출연금이 10년째 한푼도 안 들어오고 있다. 직원인건비와 운영비가 1년 사업비 예산 중에서 거의 20%에 가까운데, 이 예산을 민간(영화상영관 입장권)에서만 충당하는 기관이 순수 지원 기관 중 우리 말고는 없다.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기관의 인건비까지 민간에서 걷은 영화발전기금에서 지출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영진위는 문체부와 함께 이 문제를 두고 해결책을 찾을 계획이다.
-신임 위원장 선임 또한 시급한데 늦어지는 이유가 뭔가.
=제도적인 문제가 있다. 영진위원이 먼저 구성되면 그중의 일부와 외부인사가 구성된 위원장 임원추천위원회가 꾸려진다. 임원추천위원회에서 절차에 맞게 3∼5명의 복수후보를 문체부에 추천을 하고, 문체부는 그 명단을 추려 청와대에 넘긴다. 청와대는 인사 검증을 한 뒤 문체부에 결과를 전달하면 문체부 장관이 임명하는 방식이다. 그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예정대로라면 11월 29일쯤 위원장 후보를 문체부에 넘길 수 있는데, 청와대가 인사 검증을 빨리 잘해주는가에 선임 일정이 달렸다.
-어떤 사람이 신임 위원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임원추천위원장으로서 대답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영화계가 기본적으로 원하는 일반적인 기준은 있겠지. 영화 현장에 대한 이해가 깊고, 경험을 갖춰 영진위를 잘 꾸려나가고, 영화계와 소통이 잘되는 사람이다.
-지난 9년 동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게 관건인데.
=누가 위원장으로 올지 모르겠지만 신임 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신뢰를 회복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본다. 문제는 영화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느냐다. ‘네가 들어갔으니 제대로 해봐라, 어떻게 하는지 보자’라는 게 새 영진위원에게 거는 영화계의 기대일 텐데 영진위가 요술방망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 기대를 못 채워줄까봐 걱정이지.
-부위원장 업무 때문에 현재 촬영 중인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 진행에는 차질이 없나.
=이창동 감독 스스로가 제작자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있어 큰 걱정은 안된다. 어쩔 수 없이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게 돼 영진위 일에 좀 매달려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하니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말해주었다. 고맙지. 공직 (이창동 감독은 2003년 2월부터 2004년 6월까지 제6대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다.-편집자) 경험이 있어 공직 책임을 맡은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분이니까. 밖에 나가서는 촬영현장을 버려두고 영진위에서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설레발을 떨지만 그렇게 큰 걱정은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