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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마린보이> 진모영 감독 - 잠수부, 탈북자 무엇보다 아버지
이주현 사진 오계옥 2017-11-09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로 노부부의 사랑을 이야기했던 진모영 감독은 <올드마린보이>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의 주인공은 ‘북에서 온 머구리’ 박명호씨와 그의 가족이다. 목선에 가족을 태우고 서해를 가로질러 탈북한 그는 강원도 고성에서 심해 잠수부로 생활하며 터를 잡았다. 극한 직업인 머구리로서의 삶도, 탈북자로서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진모영 감독은 그에게서 가장의 책임을 보았다. 특수한 직업과 배경을 가진 인물임에도 그의 실존적 고민에 밀착하려는 감독의 태도는 이 영화를 보다 보편적인 감동의 서사로 이끈다.

-2014년 3월부터 3년 가까이 촬영했다. 예상보다 촬영이 길어졌는데.

=초기엔 국제공동제작을 통해 기금을 마련하려 했다. 그래서 영화의 주제도 이방인으로 잡았는데 그게 잘못된 방향이란 걸 알았다. 촬영하면서 영화의 테마가 총 3단계를 거쳤다. 처음엔 인생에 대한 이야기, 두 번째는 이방인의 이야기, 세 번째는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초창기엔 머구리로서의 직업세계가 중심이었고 두 번째 시기엔 탈북자로서의 삶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박명호씨 가족이 남한에 정착한 지도 10년이 됐고 정착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방인의 이야기를 하기엔 한 시기가 지난 느낌이었다. 그렇게 주제가 바뀌면서 촬영이 길어진 것도 있고 또 하나는 수중촬영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중촬영의 세계도, 바다의 세계도 내게는 너무나 생소한 분야였다.

-촬영하면서 영화의 주제가 3단계로 변했다고 했는데, 탈북자이기도 하고 잠수부이기도 한 박명호씨의 정체성을 결국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이 시대의 보편적 아버지상으로 풀어냈다.

=이야기의 시작은 <KTX 매거진>에서 본 두 다리를 잃은 머구리에 관한 기사였다. 잠수병으로 기사의 주인공이었던 분과는 함께 촬영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새로운 인물을 찾다가 박명호씨를 만났다. 초기엔 성질대로 안 되는 인생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수해야 하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스타트를 한 작품이었다. 박명호씨를 섭외할 때도 그 주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 스스로 표류하게 된 것 같다. 이게 머구리의 인생 이야기인가, 탈북자의 이야기인가 하고. 국제공동제작을 위해 만난 외국 관계자들은 박명호씨가 탈북자라는 데 관심이 많았다. 북한에선 어떻게 탈출했고, 남한에 와보니 어떻고, 남북 비교를 많이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런데 언급했듯 그는 이미 남한 사회에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과정을 쭉 거치면서 그가 진짜 고민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존에 배를 몰았던 선장을 배에서 내리게 하고 아들을 선장으로 세운다거나, 아내를 움직여 횟집을 열거나, 이런 일들이 다 그의 설계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을 최우선으로 걱정하는 가장으로서의 모습이 중심이 됐다.

-아버지 박명호씨는 당장 내일 먹을 쌀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바다에 들어가고, 첫째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도와 배를 타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번 돈으로 공부를 한다. 한국 사회의 세대론을 집약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영화 작업하면서 좋았던 것도 박명호씨네 가족이 특별하지 않다는 거였다. 가족 구성원의 전형성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이 가족에게도 적용된다. 여느 집안처럼 장남은 희생하고 차남은 자유롭다. 아버지라는 든든한 존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철없이 웃고 까불면서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아버지들은 그렇게 위대한 인물들이 아니다. 처자식이 딸려 있으니까 용감해질 수밖에 없고, 그건 박명호씨도 마찬가지다. 속초의 극장을 대관해서 박명호씨 가족에게 완성된 영화를 보여줬는데, 첫째 아들이 그러더라. 영화를 보니까 3년 동안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알 수 있었고, 순간순간 욱했던 자신의 감정과 말도 곱씹어보게 됐다고. 그래서 영화 찍길 잘한 것 같다고. 그 말이 괜히 고마웠다. 결국 이 가족도 우리 주변의 여느 가족과 다름없는 평범한 가족이다.

-박명호씨가 마음을 많이 열고 속내를 털어놓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대상에게 다가가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

=이 사람이 과연 나에게 마음의 문을 다 열었을까 하는 의문은 있다. 지금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탈북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다 여는 건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 한마디에도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을 거다. 마음의 문을 다 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연 것은 맞다. 촬영을 한번 해봅시다, 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부터는 빗장을 열고 자기 세계로 들어오도록 허락한 거다. 머리가 아주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는 3년을 붙어 촬영하는데 자기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촬영 초기엔 상대와의 관계 형성에 신경을 많이 쓴다. 출연자가 독주를 좋아한다고 하면 여행길에 술도 사다주고, 커피를 좋아한다면 좋은 원두를 선물하기도 한다. 언제나 얘기한다. 우리에겐 값싼 무릎이 있다고. 작품을 위해선 언제든 무릎을 꿇을 준비가 돼 있다. (웃음)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촬영도 아름다웠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한폭의 그림 같은 장면들이 많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때는 혼자서 많이 찍었다. 그땐 DSLR로 찍지 않고 캠코더로 비디오 느낌이 물씬 풍기게 찍었다. 그때는 사람이나 배경이 워낙 좋아서 아름다운 그림을 많이 얻은 것 같다. 그 뒤로 DSLR 촬영이 유행해서 나도 한번 찍어봐야겠다 싶어서 시도해봤는데 노출과 포커스에 신경 쓰다 보니 인물에 집중할 수가 없더라. 다큐멘터리는 그림보다 이야기가 중요하지, 하면서 다시 캠코더로 찍었는데 DSLR에 비해 그림이 너무 안 예쁘더라. 그래서 <올드마린보이> 때는 여러 종류의 카메라를 섞어 찍었다. 기본적으로 그림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생각과 눈이 일치가 안 되는 거지. 눈은 아름다운 걸 보고 싶어 하는데, 머리로는 ‘그래도 스토리가 우선이지, 좋은 그림 찍겠다고 신경이 딴 데 팔리면 되나’ 그런다. 그런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혼란스럽게 작업했던 것 같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때는 아름답게 찍는 것보다 흔들리지 않게 찍자는 생각이 컸고, 이번에도 화면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보다는 안정감 있게 찍으려 했다.

-롱테이크의 수중촬영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수중촬영과 관련한 내 주문은 그저 어떻게든 바다 안에서 하나의 시퀀스가 완성되게끔 컷을 구성해 찍어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마음대로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바닷속에선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시야가 안 나온다. 박명호씨가 큰 문어 두 마리를 잡아서 끌고 올라오는 장면이나 오프닝에서 롱테이크로 문어를 잡는 장면은 고도의 테크닉을 요하는 촬영이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 ‘그래, 이런 압도적인 장면을 오프닝에서 보여줘야겠다’라고. 바다 세계의 아름다움과 역동성, 동시에 이 일의 위험스러움과 노고를 단번에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중 장면이 이 영화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그림들이 나왔다.

-차기작으로 생각 중인 이야기가 있나.

=아직은 없다. 일부러 급하게 정하지 않으려 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이후 <올드마린보이>를 하는데 어느 순간 <올드마린보이>에 미안함이 들었다. 해외 영화제에 간다고 촬영을 쉬면 <올드마린보이> 생각이 났고 부채감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 영화는 앞의 영화에 치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사람들이 세 번째 작품도 강원도에서 찍을 거냐, 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냐고 묻는데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 못하겠다. 어떤 가능성이든 열려 있고, 지금과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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