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소진_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학과 연출 전공 14학번이다.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대안영화 관련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섭외 전화를 받았을 때 거절하지 않은 건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더 말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최근 국내 극장가에 개봉한 몇몇 한국영화에 대해 많은 관객이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적은 것에서부터 그들이 영화의 전개를 위해 소비되는 방식 등이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 시각에 치우쳐 있다는 반응이었다. 영화의 흥행 여부와는 별개로 평점테러 등의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양상이나 논란에 대응하는 감독과 제작자의 발언에 대해 관객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타내는 모습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씨네21>은 젊은 관객과 이제 막 영화 연출을 준비하거나 공부하는 학생들이 지금의 변화하는 극장가 풍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한자리에 모이자마자 “기사 나가면 악플 세례 받는 거 아니냐”며 농담 섞인 걱정을 쏟아냈던 4명의 젊은 관객 혹은 예비 영화인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한국영화가 처한 많은 문제를 읽을 수 있었다. 이제 더는 견딜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외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최근 <브이아이피>와 <청년경찰> 등의 한국영화를 둘러싼 여러 논란을 지켜보면서 영화 내외적으로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무엇이었나.
=유은진_ <청년경찰> 개봉 후 누군가는 당연히 불편하게 여기는 지점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칼럼을 썼다. 그런데 글을 올리자마자 내가 ‘프로불편러’가 되어 있더라. “영화는 영화로 보면 될 것을 왜 심기불편을 토로하느냐”, “과연 일상생활이 가능하냐”라는 반응에서부터 “이런 글을 쓴 에디터는 여자겠거니 생각하며 이름을 봤더니 역시 여자더라”라는 식의 비하성 댓글이 쏟아졌다.
=김혁_ 영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무력감을 느꼈다. 예를 들어 <청년경찰>의 후반부, 두 경찰대생이 피해자 구출을 목적으로 체력단련을 하고 고기를 구워먹는 장면이 견디기 어려웠는데 주변 관객은 다 웃고 있더라. 웃음을 유발하는 연출로 인해 사람들의 해석이 달라질 여지를 만들어준 것 같아 불편했다.
=이심지_ 웃음도 웃음인데 얄팍한 정의감이 깃든 장면이라 생각했다. <청년경찰>의 두 주인공이 마치 정의로운 사건 해결을 하는 것처럼 그려내는 점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최근 한국영화 예매율 상위권에 랭크된 영화가 남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인 현상이 벌써 몇년째 지속되고 있지 않나. 다양한 방식으로 남성성을 과시하는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점점 관객도 무뎌지는 것 같다.
=곽소진_ 두 영화 모두 보는 내내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종종 한국영화를 끝까지 못 보고 도중에 극장 문을 나서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다. 단지 잔인한 장면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적어도 젠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위 영화들을 끝까지 볼 때 얻는 쾌감보다 불쾌감이 더 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극장에서 어떤 영화를 선택해야 하나. 내가 호러영화를 못 본다면 코미디를 선택하고, 멜로영화가 싫다면 다른 장르영화를 볼 수 있어야 하는 환경이 주어져야 문화의 다양성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지금 한국 극장가에서 젠더 감수성을 지닌 관객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유은진_ <브이아이피>의 평점 테러에 관해 몇몇 영화인이 ‘창작의 자유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매번 유사한 영화를 만들면서 창작자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곽소진_ 나도 논란 이후 감독과 제작자의 의견을 유심히 봤다. 한 제작자가 어느 인터뷰에서 지금의 논란을 바라보며 “누군가 농담처럼 ‘이제 디즈니영화나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라는 말을 전했다. 사실 이런 말도 되짚어봐야 한다. 디즈니 영화도 요새는 각성하고 있는 시대다. 창작자에게 자기 검열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다. 지금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추구하도록 장을 마련해주고 있다.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브레이크를 건다고 해서 다양성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이심지_서울대학교 정치학과 12학번이다. 영화동아리 ‘씨네꼼’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영화를 보게 됐다. 평소에 젠더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개봉작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는 나를 보면서 왜 그런지 고민하며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
주연보다는 조연을, 엑스트라를 보면 보이는 것들
-앞서 <청년경찰>의 몇몇 장면을 예로 들기도 했는데,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이 특히 힘들었나.
이심지_ <브이아이피>에서는 논란이 됐던 살해 장면보다 오히려 연쇄살인범 캐릭터에게 주변에서 “고자 아니냐”는 식으로 조롱하는 장면이 불편했다. 살인범에 대한 묘사로 남성성의 부족을 조롱하는 것은 분명 클리셰이며 대중에게 통하는 개그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게으른 농담이라 생각했다. 영화의 매력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살인범 김광일(이종석)이 “여자들이 죽을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아느냐”며 표정과 대사만으로 관객을 섬뜩하게 만들던 순간은 정말 무서웠다.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캐릭터를 전달할 수 있지 않나. 잔인한 장면을 넣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게 절대 아니다.
김혁_ 나 역시 <브이아이피>의 언급된 장면들이 견디기 어려웠는데 영화를 보니 린 램지의 <케빈에 대하여>(2011)가 떠오르더라. 이 영화 역시 어린 살인범 케빈이 등장하는데 활을 쏴서 사람들을 살해하는 장면의 연출이 어땠는지 다시 찾아봤다.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 반복해서 활을 쏘는 케빈의 웨이스트숏 정도를 보여주더라. 그것만으로도 감정이 전달된다.
곽소진_ 어떤 영화가 윤리적인가, 윤리적이지 않은가를 판단할 때 주연보다는 조연이나 엑스트라를 유심히 본다. <택시운전사>를 볼 때도 그랬다. 어떤 여자가 주먹밥을 주고 사라진다. 이 여자는 영화 내내 주먹밥 여자로 존재하게 된다. 사려 깊은 영화란 이런 한 장면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전혀 논란이 될 것 같지 않은 영화들에서도 불편한 점이 보이는 이유는 여성이란 인간 자체에 대해 깊이 탐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장르영화라고 해도 등장하는 여성들이 결코 기표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심지_ 최근의 논란 속에서 나 자신을 검열할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영화 속 폭력 자체를 싫어하는 건가, 아니면 몇몇 잔인한 장면을 싫어하는 건가, 스스로 질문을 해보게 됐다. 나는 분명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 속 폭력을 볼 때 영화적이라고 생각하며 본다. 장면의 미적 설정 자체가 관객의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영화를 보며 불쾌감이 드는 이유는 해당 폭력 묘사가 전체 영화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은진_ 언제부터 이렇게 유사한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진다. 최근 한국영화의 캐릭터 유형으로 비추어보면 그저 남성영화 혹은 여성영화로 나뉠 뿐, 남녀 캐릭터가 동등하게 등장해서 사건을 벌이는 영화가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곽소진_ 최근에 김훈 작가가 장편소설 <남한산성> 100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여자를 생명체로 묘사하는 것을 할 수는 있지만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서투르다.”라고 이야기한 사례도 사실 충격적이다. 지금 한국에서 그 정도의 위상을 가진 소설가가 공식적으로 여자를 모른다는 식으로 말해도 소설이 팔리는 현실이 놀랍다. 영화도 소설도 모두 인간에 대해서 다루는 분야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여성을 몰라도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지는 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점에서 인간의 범주에 여성이 안 들어가도, 혹은 잘 몰라도 티가 안 나기 때문이다. 장르영화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여성에 대해 몰라도 되는 영화가 만들어진다. 여성은 김훈 소설에서처럼 “젖국 냄새”나는 정도의 존재로 혹은 요즘 영화에서처럼 여자 시체로 존재하니까. 이를 단순히 창작자의 아이디어 문제로 보지는 않는다. 여러 복합적인 상황이 얽혀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인간을 다루는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이 사실상 반쪽짜리 삶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들이 인간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유은진_<씨네21>과 <한겨레>가 합작하여 운영 중인 네이버 모바일 영화판 ‘씨네플레이’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최근 ‘내가 <청년경찰>을 보고 불쾌해진 이유’라는 제목의 에디터 칼럼을 써서 네이버 메인에 노출됐다가 1500여개의 악플 폭탄을 맞고 새삼 문제의식을 다시 갖게 됐다.
여성 인권 이슈에 대해 반응하는 어떤 패턴
-유은진 에디터의 칼럼에 대한 악플 세례나 <브이아이피>에 대한 평점 테러 등 격렬하게 양분된 반응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유은진_ 나는 분명 칼럼에 남성을 혐오한다고 쓰지 않았다. 그런데 대부분 나를 가리켜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이라고 한다. 되레 그들에게 눌려서 내가 순간 뭘 잘못 쓴 건가 싶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반응에 주눅들지 말고 귀 막지 않고 계속 말하고 써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창작자들도 지금보다 더 자기 검열을 하게 되지 않을까. 비록 이제야 시작하는 단계인 것 같지만 말이다.
곽소진_ 평점 테러라고 부르지만 사실 <브이아이피>에 대해 그들이 1점씩 평점을 남기고 쓴 한줄 평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자신의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한 사람이 많다. 결국 그들의 목소리가 모여서 감독이나 제작자에게까지 전달된 사례다. 또한 논란이 있는 영화가 단순히 흥행했다고 하더라도 그 영화를 선택한 관객에게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다. 지금 관객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있고 대형 배급사가 영화를 배급하는 상황에서 관객의 수치는 객관성을 지니기 어렵다.
김혁_ 댓글로 해당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 가운데는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라는 말만 나오면 무조건 달려드는 사람도 있다. 소재가 영화일 뿐 그들이 여성 인권 이슈에 대해 반응하는 패턴은 다른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똑같다.
-현재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의 영화를 보면서 문제의식을 느꼈거나 혹은 이러한 논란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딪친 적은 없나. 학교 내 분위기도 궁금하다.
김혁_ 영화 만들기 수업 때 누군가 써온 시나리오를 다 같이 읽고 코멘트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때 여성 혐오적 묘사가 등장하면 친구들끼리 격렬하게 논쟁한다. 심한 말다툼으로 번질 때도 있다. 예전과 확실하게 달라진 점은 학교 안에서도 긍정적인 자기 검열을 하게 됐다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주제를 전달하는 방법을 각자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영화제에 가서 보는 단편영화들 중에 기존 상업영화를 볼 때와 같은 기분이 드는 경우는 많다.
곽소진_ 우리 학교에서도 그런 종류의 표현이 많아졌다. 지금의 상황에서 학과 교수진의 성비가 정말 중요해졌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우리는 페미니즘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이제야 조금씩 기회가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교수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나리오나 콘텐츠를 만들어 갔을 때 남성 교수님들이 모니터링을 잘해 줄 수 있을지가 미지수다. 또 학교 내에서는 이런 사안을 두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 보는 학생들과, 그와 달리 이전보다 자기 검열을 강화해야 한다는 학생들로 나뉘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이런 논란이 자유의 억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았을 때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은진_ 부모님은 내가 쓴 칼럼에 대해 단순하게 “왜 코미디영화를 그렇게 심각하게 봤어?”라고 하셨지만 기성세대의 반응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내 또래의 반응이었다. 친구의 회사 남자 동료가 ‘페미니즘’에 대해 열변을 토한 적이 있는데 외국에서의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기회를 받으며 평등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고, 한국에서의 페미니즘은 단순히 말도 안 되는 ‘여성 우월주의’로 변질된 거라고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다. 그 말 자체도 잘못된 것인데 그런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는 남성들이 많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에서 ‘여성 우월’이 가능한 게 뭐가 있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냥 재미있던데”를 넘어 “왜 이렇게 예민하냐, 프로불편러다”라고 말하며 불편해하지 말고 주어진대로 살라고 내게 말하는 사람들을 꾸준히 만족시키는 콘텐츠가 재생산되고 있어서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
김혁_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15학번이다. 일상에서도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려 노력중이다. 평소 여러 인권 이슈에 관심이 많다. 최근 몇몇 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너무나 친절하게 설명한 비평에 대한 댓글 반응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꼈다.
일시적인 현상에 머물지 않기를
-한국영화를 향한 이같은 논란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앞으로 관객과 창작자가 어떻게 변해가길 바라나.
유은진_ 이런 현상이 전혀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길 바란다. 오늘 이야기를 하다보니 영화 제작은 기획, 투자, 배급에 이르기까지 아주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고쳐나가야 하는, 긴 시간이 필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여성영화’가 아닌 이상,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에 주목하는 감독이 거의 없다. 국내 영화 속 인상 깊은 여성 캐릭터를 10명만 꼽으려 해도 아마 10년 전 영화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할 것 같다. 억지로 짜내지 않고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 리스트를 ‘올해’로 한정해도 쉽게 꼽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곽소진_ 여성 관객으로서뿐만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영화가 뭐지?’라는 생각을 해볼 때다. 한국영화에서 비슷한 답습이 몇년째 이뤄지는 상황에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 지금 한국영화, 너무 위기 아닌가? 너무 재미없지 않나? 최근에 한달에 한번 여성영화를 상영하고 여성영화를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등을 개발할 목적으로 준비하는 ‘퍼플레이’라는 팀의 텀블벅 후원을 했다. 이들이 만드는 굿즈 티셔츠에는 ‘for feminist film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우리가 여성영화에 얼마든지, 심지어 많은 돈을 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관객으로서의 희열과 즐거움을 되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