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토믹 블론드>와 <매혹당한 사람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래픽노블이 원작인 <아토믹 블론드>는 음악과 디자인에서는 과장된 1980년대 양식을 택하지만 액션에선 가차 없는 사실성을 추구한다. 주인공 로레인 역의 샤를리즈 테론이 대부분 직접 감당한 긴 호흡의 격투 시퀀스를 보고 있노라면 관객의 몸에도 상상의 피멍이 든다. 현란한 편집을 배제한 <아토믹 블론드>의 격투는 할리우드 평균치보다 느리고 힘겹다. 양쪽이 쓰러졌다 다시 맞붙기까지 몇초의 가쁜 호흡까지 그대로 살리는 식이다. 여성의 완력이 갖는 한계를 기물을 이용하고 급소 공격으로 돌파하는 로레인에게 적들은 여성혐오적 욕설을 내뱉는다. 특히 동베를린 탈출 도중 계단 액션의 끝에선 테론을 향한 존경이 솟는다. 원 테이크처럼 보이도록 살짝 봉합된 시퀀스이긴 하지만, 누가 그걸 신경 쓴단 말인가!
08/25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흔들리자 냉전 양 진영의 스파이들은 혼란에 빠진다. MI6 정예 로레인은 KGB의 손에 넘어가면 치명적일 수 있는 비밀요원들의 리스트를 동베를린에서 환수해 오는 사명을 띠고 투입된다. <아토믹 블론드>는 여기서 과욕을 부린다. 완벽한 패션, 슈퍼히어로급 능력을 지닌 인물이 중심인 액션영화에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풍의 만인이 만인을 속이는 플롯을 고집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플롯을 MI6 취조실에 불려온 로레인의 회상을 액자삼아 한번 더 둘러치는 것이다. 이 복잡한 서술방식은 무엇이 됐건 의도한 효과보다 부작용이 크다. 영화 초반부터 <아토믹 블론드>의 리듬은 난조다. 프롤로그가 끝났나 싶으면 진짜 시작이 아니고 도입부가 끝났나 싶으면 다시 타이틀이 뜨는 식으로 이륙부터 질질 끈다. 대신 이 영화는 리듬감을 액션과 삽입된 1980년대 음악에 올인한다. 가령 로레인이 잠입한 아파트에 들이닥친 적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동안 80년대 듀오 왬의 노래 <Father Figure>가 흐르는데 그녀가 착지해서 마지막 일격을 가한 다음 조지 마이클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마지막 소절 “Till the end of time”을 읖조리는 식이다. 복잡할 뿐 아니라 몇 차례 반전하며 뒤채는 플롯은 딱히 치밀하지도 않다. 반전이 사실이라면 로레인이 그렇게 반응하거나 행동했을 리가 없는 장면들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떠오르는 것이다. 결국 <아토믹 블론드>의 반전은 마주하는 순간 “앗, 과연!”이라고 무릎을 치는 대신 따라가는 동안 조금 지쳐버려서 “뭐? 정말?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라고 반응하게 된다.
<아토믹 블론드>의 주인공이 남성이었다면 이 영화를 눈여겨볼 이유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샤를리즈 테론은 영화에 나신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은 이 장면을 놀랄 만큼 섹슈얼한 느낌 없이 찍었다. 카메라는 얼음을 채운 욕조에 잠겨 있다가 일어서는 그녀의 몸을 오직 상처투성이 전사의 육신으로서 바라본다. 한편 이 영화에서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하는 닳고 닳은 첩보원 퍼시벌 다음으로 중요한 조연은 소피아 부텔라가 연기한 프랑스 스파이 델핀인데, 그녀는 로레인과 사랑에 빠지는 007 시리즈의 본드 걸에 해당하는 역이다(원작에서 델핀 역은 프랑스 남성 첩보원이라고 한다). 둘의 관계가 여성 대 여성이라는 점을 ‘특별 언급’하기 위해 영화가 지체하지 않는 점, 델핀과의 연애가 심심풀이는 아니되 로레인의 캐릭터 행로를 결정적으로 바꾸지 않는 점도 시나리오의 영리한 선택이다.
08/29
남북전쟁 종전을 1년 앞둔 1864년 버지니아. 숲에서 버섯을 따던 10대 초반 소녀 에이미(우나 로렌스)는 적군인 북군의 부상병(콜린 파렐)을 발견한다. 지혜롭게도 존 맥버니 상병은 소녀를 향해 윽박지르는 대신 “무섭니? 나도 무섭다”라고 말을 걸고 소녀는 참다운 기독교인답게, 다른 네 학생과 함께 지내는 근처의 판스워스 기숙학교로 남자를 부축해 간다. 그곳에선 저택 주인이자 교장인 마사(니콜 키드먼)와 오랫동안 유일한 교사로 일한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가 다섯 학생을 가르치고 돌보며 ‘남부판 <작은 아씨들>’ 같은 정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매혹당한 사람들>과 루이자 메이 올컷 소설의 차이는 명확하다. 이 백인 여성들은 바깥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돼 전쟁이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다. 노예들은 떠났고 앞으로의 세계는 달라질 참이지만,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숙녀의 교양을 배우고 가르치며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뿐이다. <매혹당한 사람들>의 기숙학교는 험한 바깥으로부터 단절된 채 욕망들이 어우러지는 어여쁘고 특권적인 장소, 즉 <마리 앙투아네트>의 베르사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도쿄 특급호텔 등과 같은 소피아 코폴라가 선호하는 공간이다. 간헐적으로 땅을 울리는 포성 사이로 그래도 여자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낙엽만 굴러가도 깔깔거린다. 존이 회복하는 동안, 일곱 여자는 그를 저어하면서도 그에게 매료된다. 욕망의 대상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을 간파한 존도 점점 생존 이상을 꾀한다. 그가 악한은 아니나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섣불리 품은 우월감과 기회주의가 불운을 초래한다.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1971년 돈 시겔이 만든 동명 영화의 재해석이며 대부분의 주요 플롯을 공유한다. 서사의 대동소이함에도 불구하고 코폴라의 신작은 ‘리메이크’라는 표현이 어색하다. 돈 시겔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여성 욕망의 광기에 포위된 남성의 거세 공포를 주목한 호러에 가깝다면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여자들을 움직인 매혹의 성격, 그것을 통제하거나 통제하려다 실패하는 제스처, 그것들이 어울려 조성하는 무드에 주목하는 드라마다.
1971년작에서 존을 둘러싼 여성 인물들의 동기는 성적 욕구불만과 호기심, 로맨틱한 열망이 지배적이었다. 코폴라는 일곱 인물의 욕망을 좀더 상세히 살핀다. 홀로 학교를 이끌어온 마사는 든든한 조력자를 아쉬워하고, 에드위나는 자신을 학교 밖으로 데려다줄 손을 열망한다. 알리시아(엘르 패닝)는 빨리 성인 여성이 되고 싶고 에이미는 지적인 호기심을 나눌 친구를 원한다. 존 맥버니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심한 유혹자다(오직 남자라는 희소가치로 매혹시킨 것이 아니다). 그는 마사에게는 강인함과 용기를 칭찬하고 에드위나에게는 새로운 삶을 약속하며 알리시아의 요염함을 확인시켜주고 에이미에겐 아빠나 친구가 그러하듯 새로운 걸 알려주며 그녀의 어깨에 기댄다. 나름대로 세파에서 차단된 안온한 ‘고치’의 무드가 강조되고 캐릭터가 원작보다 선명해지면서 유머가 강화됐다. 존이 애플파이의 맛을 칭찬하자 마사는 요리한 에드위나를 언급하며 “내가 준 레시피 맞지?”라고 넌지시 못박고 에이미는 사과를 따왔다고, 다른 소녀는 땅을 갈았다고 공치사를 한다. 애플파이도 이 대화만큼 맛있진 않을 것이다. 돈 시겔 감독은 고려하지 않았던 소녀들의 천진난만한 왁자함도 소피아 코폴라는 포용한다. 작은 숙녀들은 “다같이 남부의 인심을 보여줘서 계속 여기 있게 하자”라고 모의하다 “다들 싫어하니까 이만 가달라고 할까?”라고 울상을 짓는다.
소피아 코폴라의 연출은 남녀 모두에게 너그럽다. 그녀의 존 맥버니는 1971년작의 거짓말을 일삼는 남자가 아니고 교장의 비밀스러운 가족사는 생략됐다. 도덕성 검열에서 막 벗어난 할리우드의 소산으로서 레즈비언 판타지, 근친상간, 소아성애의 코드를 두루 건드리고 하드고어를 포함했던 돈 시겔 작품과 달리 새로운 <매혹당한 사람들>은 해방감을 누리기 위해 금기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 시각적 톤도 이야기의 해석에 동조한다. 레이스 천들은 필터처럼 종종 눈앞을 가리고, 촛불로만 밝혀진 실내와 안개 서린 장원을 얕은 초점으로 촬영한 화면은 몇 세기 전 과거로부터 날아온 세피아 톤의 그림엽서 같다. 이 부연 시야는, 극중 여성들이 외부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피아 코폴라는 원작 소설과 1971년작 영화에 있던 흑인 하녀 캐릭터를 없앴다는 이유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얼핏 뉘앙스와 매너의 연구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당시 필사적으로 단정하고 우아한 생활을 유지했던 남부 백인 여성들이 외부의 현상을 외면하고 자처한 고립의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소피아 코폴라는 돈 시겔의 <매혹당한 사람들>과 180도 반대 앵글로 영화를 맺는다. 저택 앞에 가족사진의 구도로 모여 선 여자들은 거대한 철문 뒤에 갇힌다.
좋아요
노장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된 <켄 로치의 삶과 영화>는 은퇴 선언 후 영국 보수당이 재집권하자 발언 의지를 억누르지 못하고 현장으로 돌아온 감독의 소회를 들려준다. 영화는 정의감과 추진력이 특별한 예술가에게 따라오는 이면도 친구의 인터뷰를 통해 기술한다. “헌신적 어머니의 외동 자식은 자기 확신이 강하고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이 영화감독이 되면 어릴 적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유지된다. 본인이 만드는 세상 안에서 전능하기 때문이다. 예의 바르지만 원하는 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인터뷰 화면을 주시하다 떠올린 사족. 켄 로치의 전기영화가 나온다면 주인공은 게리 올드먼이 최적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