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는 모험처럼 보인다. 이창동 같은 냉정한 리얼리스트가 멜로판타지를 시도한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주인공 남녀는 전과자와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너무 전형적인 약자들이다. 전과자는 범법행위를 무기삼아 힘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종두는 어딘가 모자랄 뿐 남을 해칠 만큼 악하지 못하다. 주인공들은 ‘선’으로, 사회는 ‘악’으로 고정돼 평행선을 달리면서 주인공들은 자꾸 벼랑으로 몰릴 것 같다. 이렇게 도식화됐을 때 이분법이 굳어지고, 인간을 읽을 새로운 단서나 아이러니는 실종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11월 ‘전과자와 뇌성마비 장애인의 사랑이야기’라는 힌트만 주고 촬영에 들어간 지 5개월이 흐른 지난 4월3일 제작진은 처음으로 촬영현장을 공개했다. 이를 계기로 영화의 자세한 줄거리를 접했을 때, 우려했던 그 도식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창동 감독은 어떤 생각 아래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걸까.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은 사회, 그리고 우리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은 사회, 그리고 우리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장애인의 삶 자체가 도식이니까. 여자는 신체적 장애자이고, 남자도 사회적응을 못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장애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안팎 보통사람들의 태도가 되레 장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촬영감독이 그러더라. 주인공 둘 빼고 다 위선자 같다고.” 이 감독은 “그러나 장애 자체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장애 자체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말은 신뢰가 갔다. 장애상태를 전시해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고 거기에 편승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들렸다. 그러나 도식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는 않았다. 종두가 엄마의 생일잔치에 공주(뇌성마비 장애인인 여주인공의 이름)를 데려갔을 때 종두의 가족은 종두가 잔치 분위기를 일부러 깨려 한다고 여길 뿐이다. 누구 하나 종두의 공주에 대한 순정을 이해해주려 하지 않는다. 종두가 공주와 잠자리를 함께하다가 공주의 오빠에게 들켜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양쪽 가족은 물론 경찰까지도 한치의 의심도 없이 종두를 강간범으로 내몬다. 그 와중에 공주의 오빠는 합의금을 뜯어내려 한다. 종두와 공주의 순정이 두터워질수록, 거기에 비례해 주변사람들의 불신과 적의의 벽이 높아가는 이런 구성은 리얼리티가 있는지 여부를 떠나 너무 극적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이 감독은 잘못된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어떤 감정이나 정서의 원형질을 그려내기 위해 우화적인 단순화의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이 감독의 말을 들었을 때, 그려내려는 그 감정은 사랑이었다. “사랑에 관한 신화라고 할까. 단순하지만 끝없이 확장되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
이 감독이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걸까.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이 영화의 마지막은 밝다. 또 절정부에서 종두는 공주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데에 성공한다. “남자가 여자의 판타지를 실현시켜 준다는 점에서 해피엔드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사랑이란 게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판타지를 실현시켜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 현실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판타지가 꺼지면 현실로 돌아온다. 판타지를 갖고 있는 동안은 사랑이다.”
영화도 사랑도 판타지
2년 전 <박하사탕>을 마치고 이 감독은 “내가 아직은 희망을 말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또 “내가 행복한 상황이 어떤 걸까 떠올려봐도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행복의 이미지를 찾지 못하겠다”는 말도 했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거라고 믿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에겐 순수와 타락,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의 영역이 분리돼 있다. 타락과 불행과 절망이 깊어서 경계선이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그 어두운 곳을 응시하는 그의 전작들은 역설적으로 잊고 지내던 순수와 행복의 원형질에 대한 갈증을 일깨워줬다. 그럼으로써 반성을 촉구하는 게 이창동 영화의 힘이자, 판타지라면 유일한 판타지였다.
<오아시스>는 공주의 상상이 실제 화면으로 펼쳐지는 노골적인 판타지를 연출한다. 화면 가득 나비가 날고, 비둘기가 방 안에 원을 그리며 날아와 앉고, 아기 코끼리가 공주의 방 안에서 춤을 춘다. 또 희망도 있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사람들이 극장에 올 때는 판타지를 느끼기 위해서다. 그 판타지가 어떤 판타지냐. 대량생산된 모조 판타지냐, 나름대로 의미있는 판타지냐. 꿈에는 개꿈도 있지만, 현실을 암시하고 현실과 조응하는 꿈도 있다. 나도 판타지를 생산해서 파는 건데 내가 파는 판타지는 어떤 거냐. 전작들에도 내 나름의 판타지가 있었다. 이 영화는 판타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의 소산이다.”
이 영화의 판타지에 대해 이 감독은 “판타지 같지 않은 판타지”라고 말했다.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판타지로만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게 예뻐봤자 얼마나 예쁘겠는가. 두 사람의 소박한 감정이 나타나면 된다.” 그는 이 판타지가 현실과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컴퓨터그래픽을 피하려 했다. 나비가 20마리씩 담긴 상자를 사서 한꺼번에 날렸지만 원하는 대로 흩어지질 않아 수십상자를 허비했다. 동물원에서 아기 코끼리를 빌리는 게 여의치 않아 조만간 타이로 갈 예정이다. 세트로 지은 공주의 방을 통째로 배에 싣고서. 그래도 나비와 비둘기로 하여금 정해진 동선대로 움직이게 하긴 힘들었다. “컴퓨터그래픽을 전혀 안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배우 들볶는 재미로 감독하는걸”
촬영현장에 있으면 이 감독은 영화 외에 다른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것 같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에서, 종두과 공주가 서울 외곽으로 놀러갔다가 늦게 돌아와 지하철 막차를 놓쳐버린 뒤 멍하게 앉아 있는 장면을 찍으면서 두 시간에 걸쳐 리허설까지 포함해 7∼8차례 카메라를 돌려본 뒤 직접 카메라를 메고서 위치를 이동시켰다. “바보 같은 사랑이야기다. 아름답지 않게 찍는다. 조금이라도 영화적인 느낌이 들면 다시 찍는다. 아무리 건조하게 하려 해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다른 느낌이 나온다. 그걸 배제하려고 최대한 애쓴다.”
배우들도 꽉 틀어쥐고 간다. 지난해 말 <오아시스> 제작발표회 때 이 감독은 배우들이 알아서 하도록 최대한 놓아두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던 모양이다. 촬영현장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그때 말대로 놓아두고 있냐”는 질문을 받고는 “내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라며 부인하려 하자 옆에 있던 설경구씨가 “했어요”라고 못을 박았다. “이상하다. 내가 왜 배우를 가만히 놔두느냐. 배우 들볶는 재미로 감독하는데. 영화를 찍으면 평소에는 없던 가학심리가 생긴다.” 설경구씨가 다시 말을 받았다. “(이 감독과)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그 말 할 때 안 믿었다.”
그런 꼼꼼함으로 인해 <박하사탕> 때도 그랬던 것처럼 결국 최근에 개봉예정일을 6월에서 8월 초로 옮겼다. “8월 초까지는 충분하다.” 이번에는 자신있어 하는 것 같았다. 임범 isman@hani.co.kr▶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촬영현장 첫 공개
▶ <오아시스>는 어떤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