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덩치의 소년이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들판에 서 있다. 소년은 이제 고등학교 졸업반이다. 또래 친구들이 그렇듯 소년도 자신을 길러준 부모 곁을 떠나 독립을 할 참이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었던 순둥이 소년은 요사이 더욱 말수가 줄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소년은 남들과는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또래 소년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큰 키와 회색 곰 그리즈리만 한 덩치의 외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소년은 지구인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소년은 거의 신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부모와 친구들에게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소년은 양부모가 현관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멀리 떨어진 이층 자기 방 침대에 누워서도 들을 수 있고,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벽을 투시해 보고 들을 수 있다. 그가 부모에게 보여준 하늘을 날고 트럭을 들어올리는 힘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기에 소년은 자신의 괴물 같은 힘을 감추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소년은 부모와 친구들이 자신을 괴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을 괴물로 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려 애쓰는 부모가 고맙다. 하지만 자신의 힘이 사람들에게 탄로난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괴물로 생각하고 모두 등을 돌릴 게 확실하다.
어느 날 마을에 토네이도가 몰아닥친다. 입고 있는 옷까지 갈가리 찢어놓는 흉포한 회오리바람에 떠밀려 당황한 소년은 마을의 주유소가 폭발할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위기에 빠진 주유소 아저씨를 구한다. 토네이도가 물러간 후 소년은 자신이 좀더 잘했다면 마을을 재해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자책한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괴물로 낙인찍히는 것도 두렵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지 못한 것은 더욱 괴롭다. 소년은 자신이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사람들을 불행에서 구해냈을 거라며 자책한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것이 탄로나는 게 두려워 사람들을 불행에 빠지게 한 것은 아닐까?
소년의 이름은 클라크 켄트. 그는 이제 자신의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괴물이라 손가락질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힘을 사용해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괴물임을 감춘 괴물로 살아갈 것인가?
투박한 듯 다정한 팀 세일의 펜선
슈퍼맨이 주인공이 아닌 18살 클라크 켄트가 주인공인 만화 <슈퍼맨: 포 올 시즌>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주인공 예수의 청년 시절 이야기와 비슷하다. 청년 예수는 날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 악몽에 시달리며 자신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고 매일 밤 골방의 어둠 속에서 채찍으로 등을 내리쳐 피가 줄줄 흐르는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클라크 켄트의 두려움과 고민에 초점을 맞춰 그의 내면을 훌륭하게 그려낸 제프 롭의 원작과 부얀 한센의 채색도 훌륭하지만, 이 아름다운 만화를 탄생시킨 최고의 공헌자는 만화가 팀 세일이다. 이 만화를 만나기 전 팀 세일의 그림을 본 것은 <배트맨> 시리즈에서였다. 팀 세일의 그림을 보고 가장 처음 떠올렸던 화가는 브뤼헐이었다. 팀 세일의 인물들은 모두 브뤼헐 그림 속 인물들처럼 어깨가 구부정하고 퉁퉁하며 천박해 보이는 동시에 천진해 보인다. 배트맨도 강인하고 멋진 육체를 가진 초인이라기보다는 둔중하고 투박해 보인다.
<배트맨 롱 할로윈>과 <배트맨 다크 빅토리>에서 그의 그림은 고담시 뒷골목의 음습한 습기와 악취를 그려내는 데 온 힘을 쏟는 것 같았고, 인물들은 벽돌같이 완강한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배트맨> 만화에서 팀 세일의 그림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 막스 베크만의 그림처럼 천장과 바닥이 뒤바뀌는 혼돈과 그로테스크의 세계였다. 그런데 클라크 켄트가 주인공인 이 만화에서 팀 세일 그림의 인물들은 브뤼헐 그림의 인물들처럼 투박하고 속물같은 것은 여전하지만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그림처럼 빛으로 넘쳐난다.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도시의 뒷골목을 그리던 만화가가 광활한 켄터키의 옥수수밭을 전장 페이지에 시원시원하게 그리고 대지 위에 부는 바람과 노을, 영양분 가득한 흙, 푸른 하늘을 거침없이 그린다. <배트맨>에서 그가 그리던 인물들의 뒤틀린 모습은 정신병에 걸리거나 더러운 때가 묻어 있는 듯 보였다. 특히 그의 비틀거리는 펜선은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중독자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 불안했다. 그런데 그의 비틀거리는 펜선이 클라크 켄트의 아버지 조나단과 어머니 마사를 그리자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은 사려 깊음과 자애의 마음으로 표현되고, 클라크 켄트의 태평양처럼 넓은 얼굴에 작은 섬처럼 박힌 눈, 코, 입은 그의 두려움과 강인한 의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알맞은 펜선이 되어버린다. 도시의 벽돌과 쓰레기를 그리던 펜선으로 쓰러진 옥수수와 수탉을 그리자 이 펜선이야말로 농촌을 그리는 데 가장 알맞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이 만화를 읽다 보면 팀 세일의 그림은 도시의 어둠과 강렬한 빛과 그림자로 인물을 표현하는 배트맨보다 스몰 빌의 농장과 순둥이 소년 클라크 켄트를 그리는 것에 더 알맞은 그림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클라크 켄트를 구원하다
슈퍼맨의 숙적 렉스 루터는 슈퍼맨을 가리키며 “슈퍼맨은 무엇이 최선인지 알기 위해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자이며, 그 때문에 생긴 죄의식을 견디며 살아가는 자이다”라고 표현한다. <슈퍼맨: 포 올 시즌>은 슈퍼맨이라는 가면 뒤 클라크 켄트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으며 클라크 켄트의 본질을 꿰뚫은 렉스 루터의 혜안에 감탄을 하게 된다.
<슈퍼맨: 포 올 시즌>은 괴물이지만 괴물처럼 안 보이려고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고,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에 괴로워하며 자신이 조금만 더 잘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했을 거라고 자책하는 메시아 콤플렉스에 걸린 가련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국인이 자신들만의 메시아가 출연하는 미국판 <신약>으로 슈퍼맨을 만들어낸 이래 그와 비슷한 수많은 종류의 슈퍼맨 이야기 속에서 만화가 팀 세일은 특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클라크 켄트를 구원해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