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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미로, 리부트라는 주술
송경원 2017-07-10

소년은 잠들지 못한다

거대한 천막이 들어섰다. 여기저기 누더기처럼 기운 자국이 역력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부피를 불려나간다. 매해 더 큰 천막을 세우는 걸 자랑으로 삼던 그 동네에서도 한번도 도달하지 못했던 규모로 커져, 이제는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할리우드의 시네마틱 유니버스 프로젝트는 하나의 시스템을 넘어 종교가 된 것 같다. 흥행을 위해선 반드시 영화들을 연계시켜야 하고, 개별 영화에 떡밥을 깔아야 하며,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해야 한다는 믿음이 퍼져나가고 있다. 10년을 두고 이어지고 있는 프로젝트가 아직 첫 번째 마침표도 찍어보지 못한 채 할리우드가 감당하기 힘든 크기와 무게로 시장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관객은 연속극을 보는 기분으로 앞선 내용들을 숙지하여 따라가야 하고 개별 영화의 가치는 점차 희미해져간다.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가 어느덧 대단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페이즈3의 종착이 다가오는 지금 한 가지 두려운 생각이 스친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마감되고 이야기가 ‘하나’ 끝났을 때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질 것인가. 할리우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프로젝트가 끝나지 않게 연장하는 것뿐이다. 밤이 오는 게 두려운 소년은 잠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다 아는 동화를 반복해서 듣는다. 그렇게 이야기는 잠들지 못한 채 피곤한 도돌이표를 찍고 있다. 동력이 떨어진다 싶을 때마다 되살아나는 영웅 ‘스파이더맨’의 세 번째 부활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5년 남짓한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스파이더맨>이 세번이나 리부트된 건 몇 가지 사정이 있다. 우선 컬럼비아와 소니로 넘어간 판권을 유지하기 위해 몇년 간격으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속편이 계속 안정적인 결과물로 나올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속편이 세편을 넘겨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영화를 종횡으로 연결시키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옆 동네 마블의 성공담이 부러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결과 스파이더맨을 다시 15살 소년으로 되돌려 마블 식구로 다시 편입시키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해도 된다. 할리우드는 원래 다음 성공을 욕망한다. 이를 위해 100년 넘게 전략을 가다듬어왔으며 우리가 익숙하게 즐기는 장르도 그 부산물에 가깝다. 비슷하지만 한끗 다른 이야기가 반복, 소비되면 그게 장르가 된다. 장르는 관객에게 재미를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광고판 중 하나였다. 속편도 마찬가지다. 성공한 작품의 속편은 완성도와 무관하게 기본적인 흥행을 보장한다. 욕하면서 보고, 후회해도 내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할리우드 프랜차이즈의 마법은 그렇게 다듬어져 왔다.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속편을 욕망하던 할리우드가 찾아낸 금맥이나 다름없다.

처음엔 이렇게 잘될 줄 몰랐을 것이다. 슈퍼히어로영화의 블록버스터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2002)이었다면(물론 팀 버튼의 1989년작 <배트맨>을 먼저 언급해야겠지만 CG, 3D 등 기술과의 결합이 중요한 요소가 됐다는 점에서 21세기 슈퍼히어로로 한정짓겠다) 2005년부터 시작된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는 질적인 확산을 불러일으켰으며, 2008년 <아이언맨>은 MCU의 첫발을 내디뎠다. MCU가 처음부터 지금 같은 원대한 밑그림을 그렸다고 보긴 어렵다. 마블의 태도는 차라리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이를 해결하고 관객의 변덕에 맞추는 서비스에 가깝다. <아이언맨>의 성공과 달리 <인크레더블 헐크>(2008)가 부진하자 마블은 바로 프로젝트를 수정해 <아이언맨2>(2010)를 꺼내 상황을 수습했다. 이후 <토르: 천둥의 신>(2011), <퍼스트 어벤져>(2011) 등 어벤져스팀의 영웅들을 차례로 선보이며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모든 것은 <어벤져스>(2012)를 성공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한편만 성공한다면 <어벤져스>라는 골대까지 안정적으로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는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의 프로젝트였다. 세계관을 공유하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전략은 실상 장르, 속편, 시리즈, 프랜차이즈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방식의 연장이란 말이다. 다만 그 규모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장대해졌을 따름이다.

아이언맨, 헐크, 토르, 캡틴 아메리카로 이어지는 <어벤져스>는 한편의 영화나 다름없는 서사로 묶여 있다. 아이언맨으로 운을 띄우고 토르가 신화와 마법, 판타지를 담당한 후 캡틴 아메리카가 갈등과 사건의 뼈대를 담당한다. 마블에서 페이즈1, 2, 3으로 명명하는 <어벤져스>의 구분은 사실 속편과 시리즈의 법칙을 그대로 따른다. <어벤져스>가 나왔고,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이라는 두 번째 영화가 나왔으며, 2018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라는 3편이 나올 예정이다. 페이즈마다 전략의 방향과 성격도 미묘하게 달라지는데 페이즈1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어벤져스>라는 한 사이클을 완성했고, 이때 발생한 문제를 다음 페이즈에서 반영하여 해결하는 식이다. 가령 페이즈2의 서사는 엄밀히 말해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아닌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에서 마감된다. 영웅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다보니 개별 영화들의 개성을 보장하던 페이즈1의 전략을 고수하기 어려워진 결과다. 게다가 영웅간의 파워 밸런스를 조절해야 하는 문제도 있어 굳이 한편의 영화, 하나의 빌런에게 이를 부담하게 하지 않고 나눠 담았다고 볼 수도 있다. 요컨대 어벤져스 페이즈2의 파트1이 <에이지 오브 울트론>, 파트2가 <시빌 워>에 가깝다는 말이다.

<어벤져스>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뉴욕 침공 이후 달라진 세계를 직면하는 영웅들처럼 할리우드도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효용을 학습했다. 이후 DC나 유니버설 등 다른 스튜디오도 차례로 이 위험하고 거대한 구상에 속속 뛰어들기 시작한다. 마블의 경우 10년을 끌어온 시리즈의 피로감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점차 한 시즌의 드라마의 에피소드처럼 섞여들며 개성을 잃어간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 결과 투입된 영웅이 ‘어린 스파이더맨’이다. 어벤져스팀의 지주인 아이언맨과의 호흡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이번 시도는 성공했다고 본다. 문제가 생기면 반영하고 수정하는 마블의 유연함이 빛을 발한 부분이다. DC나 유니버설의 경우엔 한층 암담한데 거대한 텐트를 세우려 구상했지만 하나의 실패가 전체로 이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상업적인 흥행과는 별도로)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새로운 형태의 프랜차이즈를 제대로 운영하고 있는 건 마블 하나다. 하지만 그런 마블조차 아직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최종장을 남겨두고 있다. 다시 말해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아직 한번도 제대로 마감된 적이 없기에 누구도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완결된 서사를 체험하지 못했다. 10년에 걸친 거대한 규모의 시리즈물(페이즈1, 2, 3)을 즐기고 있지만 이 프로젝트가 거대한 실패로 마감될 경우(혹은 <인피니티 워>가 지금과 같은 피로감의 절정으로 치달을 경우)의 후폭풍, 허탈감을 감당 할 수 있을까. 마냥 낙관적으로 바라보기엔 이 속편의 공식이 이제껏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규모까지 팽창했다.

이번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사례가 의미심장한 건 그 때문이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 3편에 이르러 동력을 잃자 그들은 같은 세계를 뒤집어엎고 처음부터 시작해버렸다. 흥미로운 영웅을 놓칠 수 없는 건 이해가 가지만 달리 말하자면 컴퓨터에 오류가 났다고 그냥 재부팅 버튼을 누르는 ‘컴알못’의 작태와 다를 바 없다. 두 번째까지는 궁여지책이라고 봐줄만 하지만 세번이 되면 습관이다. 상대적으로 준수하게 나온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성취가 이후 문제가 생기면 리부트하면 된다는 인식으로 이어질까 싶어 마냥 반갑진 않다.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할리우드가 종전에 보지 못한 거대한 미로를 선사했다. 속편의 사이클이 최소 10년 단위가 되어버린 지금 흥행의 관점에서 이 미로의 전략은 꽤 유효해 보인다. 미로가 끝나기 전까지는 재미가 있든 없든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금, 리부트라는 주술이 더해졌다. 할리우드는 관객이 드는 한 이야기가 망가지는 걸 주저하지 않고 시체조차 되살린다. 결코 마침표를 찍지 못하도록 주술에 걸린 <트랜스포머>의 상황을 보라. MCU의 이야기에 하나의 마침표가 찍힐 때, 그것이 온전히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트랜스포머> 같은 괴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바야흐로 이야기가 혹사당하는 시대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욕망 위에 누운 소년은 오늘도 잠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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