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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리얼리티다
2002-04-10

조선희의 이창

누구나 개인의 경험은 특수한 것이지만, 그걸 보편적인 코드로 옮기는 게 작가다.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를 봐도 그렇다. 영화에는 감독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하나 안 나오지만, 그 모든 풍경과 표정과 대사에서 그의 마음이 느껴져온다. 영화 마지막에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자막이 뜰 때, 나는 이 영화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화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진심이 들어 있다는 뜻에서. 만일 “이 땅의 모든 할머니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했으면, 그건 “물을 아껴 쓰자”나 “자나깨나 불조심” 같은 표어를 보는 기분으로 지나쳤을 것이다. 문제는 ‘외’(外)가 붙었다는 데 있다. 외할머니, 바깥에 있는 할머니다. 주류나 정통이 아닌 만큼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나는 훌쩍거렸는데, 아마 감독이 자신의 외할머니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나 보다.

어떤 문학평론가가 이런 얘기를 했다. “자기 경험을 가지고 쓴 소설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쓴 소설은, 평론가들이 집어낸다.” 이런 걸 가지고 사람들이 ‘진정성’이라 부르는 것 같다. 리얼리즘이 육체와 정신을 갖고 있고, 육체가 이야기 구조의 치밀함이나 묘사의 생생함 같은 것이라면, 정신은 바로 이런 진정성일 것이다. 어떤 이야깃거리는, 가만히 놔둬도 우리 인생에서 자발적으로 막 튀어나온다. 그렇게 튀어나온 이야기라면, 평론가뿐 아니라 독자나 관객도 알아본다.

나도 처음으로 장편소설이라는 걸 쓰면서 내 자신에게 거듭 되물었다. ‘나는 지금 꼭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쓰고 있나?’, ‘이 이야기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이야기인가’.

소설가 황석영씨는 베를린 체류 시절에 장벽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장편 <손님>을 구상했다 한다. 방북과 망명과 투옥이라는 그 특별하고도 드라마틱한 경력이 그의 문학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손님>을 읽고 나니, 대가의 저력은 쉽게 훼손되는 게 아니구나, 싶다. 이 소설에는 6·25전쟁 와중의 한 마을이 나오는데, 전선이 남하했다가 북상했다가를 거듭하면서 점령군이 뒤바뀌는 동안 광기와 살기로 충전된 사람들은 방전하듯이 서로에게 잔악한 짓들을 저지른다. 인간이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그 홀로코스트 신에서 왜 눈물이 쏟아졌을까. 아마 황석영씨의 경험에는, 특수성을 뒷받침할 만한 보편성의 토양이 비옥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몫의 나르시시즘을 갖고 산다. 그러니까, 계급이 높고 낮건, 돈이 많고 적건, 어느 인생에나 판타지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누구나 제 몫의 리얼리즘도 갖고 있다.

요즘 최보은의 ‘박근혜 대안론’이 페미니즘 진영에 쟁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는 여성 정치세력화의 화두로 박근혜를 ‘사유’하자고 했고, ‘박근혜’ 자체보다 ‘여자들의 브레인스토밍’을 목표로 했던 그의 의도는 적중한 셈이다. 막연하고 고답적인 원칙론만으로는 정치발전은 물론 I.Q개발도 안 된다. 사유하든 행동하든, 당장의 이슈가 끊임없이 준비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보은의 문제제기는 시의적절했다.

최보은과 친구인 덕분에 나도 박근혜 의원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문제의 <>지 인터뷰 전날, 일종의 ‘워밍업’을 위한 저녁식사 자리에 동석했다. 그날, 박 의원에게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특이한 리얼리티였다. 가령, 우리가 “‘애국 애족’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너무 구닥다리이며 요즘 감각에 와닿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이 청와대에서 오래 살아서 그렇다고 했다. 식탁의 대화도 늘 “남부지방에 가뭄인데”, “휴전선이 불안해서” 그런 식이었다고 했다. 그는 97년 말 TV에서 IMF 뉴스를 보다가 ‘어떻게 건설한 경제인데,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까지 됐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한다. 아주 리얼한 얘기다. 그렇게 자랐으면 능히 그럴 만하다.

나도 그래서 이번 기회에,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 한번 다시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박근혜 의원은 좀 그렇다. 이런저런 정치적 맥락을 다 떠나서 그의 ‘나름대로의 리얼리티’가 너무 특수해서다. 리얼리티의 보편성을 얻고자 한다면 대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건만. 어쩌면, 그의 가장 큰 불행은, 불의의 총격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것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과 보편적 삶의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영화든, 소설이든, 누가 살아온 이야기든, 늘 감동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집으로…>를 보면서 옆의 친구가 “설정이 작위적이야”라고 말하건 말건 눈물을 흘렸고, 침대 위에 기대앉아 <손님>을 읽으면서 혼자 실컷 울었다. 하지만 박근혜라는 소설은 어디서 감동하고 울고 웃어야 할지 헷갈린다. 나름대로 리얼리티가 있긴 한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너무 특수해서. 그게 잘 와닿지 않으니, 말이다.조선희/ 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