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가 시작되자 각 대학의 총학생회가 출범했다. 학생회관 건물에는 붉은 글씨로 쓴 대형 현수막들이 걸렸다. 미군은 물러가라, 신자유주의 반대, 시장경제 반대, 노동자 파업 지지, 장애자 이동권 보장하라,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라…. 대체로 이 같은 절규들이다.
이번 학기에는 여러 대학에서 비운동권이 총학생회를 장악했고, 비운동권 총학들은 연합체를 결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비운동권이 총학을 장악한 대학의 캠퍼스에도 붉은 글씨의 현수막들은 봄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이른바 명문이라는 한 대학의 총학생회 출범식은 요란하고도 적막했다. 하드록을 두들겨대는 밴드와 아마추어 가수들을 초청해놓고 손님을 끌어보았지만 무대 아래 모인 학생은 50여명에 불과했다. 그 출범식이 열리는 운동장 옆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포크댄스나 농구나 배구를 하고 있었다. 과연, 청춘은 아름다워 보였다. 청춘은 아름다워 보였지만, 총학은 그 붉은 현수막으로 표방한 이념적 가치와 지향점을 향해서 대학 공동체의 힘을 모아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부시 방한, 친일파 명단 발표에 따른 과거 청산의 문제, 파업노동자, 대량 해고사태 같은, 말하자면 ‘움직이기 좋은’ 이유들 앞에서도 총학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학기 초부터 총학들이 머리를 싸매고 나선 일은 등록금인상 반대투쟁이었다. 총장실과 재단사무실 앞에서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등록금은 어려운 문제다. 대학측이 인상에 찬성하기 때문에 올리는 것도 아니고, 반대한다고 해서 무조건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걸 두고 양쪽이 싸운다면 그 싸움의 논거들은 주로 이념이나 신념이 아니라 현실의 아주 특정한 부분에 대한 수리적 판단일 것이다. 대학의 풍경은 급속도로 탈이념화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명문대학 도서관이 발표한 대출도서순위 목록에는 <해리포터와 마법사> <국화꽃 향기> <가시고기> <아버지> 같은 대중적 읽을거리들이 1위부터 30위까지를 몽땅 차지했고 인문교양서적이나 전공서적은 한권도 끼어있지 않았다. 대학은 명백히 대중문화의 권역에 속해있다. 대학 졸업식은 온 동네 잡상인들을 모두 다 캠퍼스 안으로 불러들여 난장판 무질서 속에서 치러진다. 그때, 대학은 난민수용소처럼 보이지만, 대학은 저 자신의 풍경을 관리하지 않는다. 나는 대학이 대중문화의 권역에 속해 있는 현상을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풍경에는 내적인 필연성이 있다고 믿는다. 대학이 보여주는 풍경들 중에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 붉은 글씨의 현수막들이다. 총학들은 더이상 지향하지 않거나, 지향할 수 없거나, 힘을 몰아나갈 수 없는 지향점들을 그토록 격렬한 이념적 구호로 내걸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 현수막들이 표방하는 지향성들이 이 시대 속에서 모두 이에 무효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지향성은 이념의 깃발로서 여전히 미래를 향해 유효하게 펄럭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그 지향성을 향해서 대학이 과연 가고 있는 것이며, 그 지향성이 일상 속에서 작동되고 있는 것인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매우 회의적이다. 붉은 현수막들은 이미 대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헤어나기가 불가능한 대중성과 지향되지 않는 지향성 사이에서 황사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념이란 대체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현실 속에서 작동되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나는 그런 질문을 괴로워할 뿐, 거기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욕망에 정의의 탈을 씌운 은폐물을 이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이 그렇게까지 더러운 곳이어서는 견딜 수가 없다.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터져나온 이른바 ‘색깔론’이란 그런 더러움을 여지없이 입증해주었다. ‘너는 빨갱이다’ 또는 ‘너는 보수반동이다’라는 공격은 더러운 공격이지만, 발목이 잡히면 끝장이다. 필사적으로 응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더러움은 강력하고도 요란한 더러움이다.
대학 현수막의 이념은 작동되지 않는, 아름다운 이념이다. ‘색깔론’의 이념은 구체적으로 작동되는, 더럽고 강력한 이념이다. 그리고 그 여러 이념들은 그것을 표방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우월성 과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이런 공허감은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진실로 선한 의지가 살아 있는 것이며, 그 선한 의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믿는다. 어느 쪽이냐를 따지기를 좋아하는 당신들은 또 그렇지 않다고 삿대질을 해댈 테지만 말이다. 김훈 / 소설가 . <한겨레> 사회부 기자 hoo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