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5월 24일부터 10월 9일까지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이름의 전시가 진행된다.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이 불확정성의 시대를 포착하고 읽어낼 것인가가 참여 작가들의 공통된 주제다. 그중 싱가포르 출신의 호추니엔 감독의 작업에 주목해봤다. 그는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싱가포르 단독 작가로 선발된 현대미술작가이며 <여기 어딘가에>(2009), <미지의 구름>(2011) 등을 만든 영화감독이다. 이번 전시에는 세편의 영상 작품이 소개된다. 신작 <동남아시아 비평 사전 볼륨2: G for Ghost(Writer)>(2017, 이하 <비평 사전>)는 26개 알파벳 각각에서 뽑아낸 26개의 키워드가 동남아시아와 관련된 5천여개가 넘는 영상과 실시간으로 무작위 편집되면서 ‘동남아시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잠정적 답변을 전한다. 삼중 스파이로 알려진 라이 텍에 관한 이야기인 <The Nameless>(2015), 유령작가로 추정되는 진 Z. 한라한에 관한 <The Name>(2015) 역시 ‘동남아시아는 실재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동남아시아인가’에 대한 작가의 질의응답이다.
-5년여 전부터 시작한 <비평 사전>은 완성형이 아닌 실시간으로 변형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진행형의 작품이다.
=흔히 ‘사전’이라고 하면 명징한 설명이 돼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권위적이다. 하지만 <비평 사전>은 동남아시아에서 촬영된 영상을 비메오와 유튜브에 올리고 음악 등과 자동 편집하는 시스템, 알고리즘이다. 편집마다 각기 다른 조합이 나오고 원소스를 업데이트하기만 하면 그 조합은 새로이 계속된다. 완성되지 않는 사전이다.
-하지만 26개의 알파벳 각각에서 파생된 단어들, 예컨대 ‘L’에서는 라이 텍(Lai Tech)을, ‘G’에서는 진 Z. 한라한(Gene Z. Hanrahan)을 뽑아내는 것이나 어떤 영상을 올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었다. 편집의 결과는 임의적이나 그 전제에는 작가가 개입했다는 데에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핵심적인 질문이다. A는 altitude(고도)로 동남아지역의 고저와 그것이 각 지역의 무정부주의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폈다. R은 resonance(공명)로 동남아시아에서 연주되는 징과 연결했다. 이 선택에 원칙은 없었다. 왜 내가 이 5천여개의 영상을 선택했을까. 나조차 궁금해졌다. 이 사전을 통해 창출해낸 동남아시아는 어떤 곳일까. 실제의 동남아시아일 수도 있고 추측되는 동남아시아일 수도 있다. 또 영상 선택 등을 ‘내가 통제하겠다’와 ‘그럼에도 통제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사이의 긴장을 생각해봤다.
-<비평 사전>의 부제는 ‘G for Ghost(Writer)’이며 연작처럼 보이는 <The Nameless> <The Name>은 유령작가 또는 유령이라 불리는 말레이시아 공산당에 대한 이야기다.
=서로 관련이 있다. 라이 텍과 같은 삼중 스파이는 그 존재가 제3자에 의해서만 설명되기 마련이다. 그의 실제 삶에 대해 그의 목소리로는 알 수 없다. 진 Z. 한라한의 경우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특별한 아카이브 자료들로 말레이시아 초기 공산당에 대한 글을 썼다고 알려졌다. 동남아시아에서는 공산주의자가 귀신, 혼령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공산당 선언>)라고 말하지 않았나.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혹은 그 반대의 것에 대한 이야기다. <The Nameless>는 배우 양조위가 정보원이나 반역자 등으로 출연한 영화 속 영상들과 함께 편집했다. 양조위는 정말 유명한 사람인데 <The Nameless>라니. 아이러니하게 들리지 않나. 반면 <The Name>은 진 Z. 한라한이 CIA와 관련이 있을거라는 여러 추측들이 나오기에 철저히 미국 작가들의 영상으로만 편집을 해봤다.
-<만 마리 호랑이들>(2014)에서도 싱가포르인들이 말레이시아 공산당을 호랑이에 비유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The Nameless> <The Name>에서도 말레이시아 공산당과 관련된 내용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
=말레이시아에서는 호랑이가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신화가 있다. <만 마리 호랑이들>에서는 라이 텍을 하나의 호랑이로 등장시켰다. 식민화 이전, 이 지역에서는 조상이 죽으면 호랑이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등 호랑이를 일종의 영매로 생각한다. 사람이 호랑이가, 호랑이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하면서 대규모 농장을 짓고 호랑이를 몰살시켰다. 싱가포르에서는 아예 호랑이가 없어졌다. 실물로서의 호랑이가 사라진 이후에 은유의 표현으로, 언어로서 호랑이가 돌아왔다는 게 흥미로웠다. 서양 고전 철학에서 인간과 동물의 구분은 언어의 유무에 달려 있지 않나. 호랑이가 원래는 동물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언어의 형태로 돌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일본군이 워낙 잔인해 반(反)인간적인 호랑이에 비유됐고 2차대전 이후에는 공산당원들이 호랑이에 비유됐다.
-‘싱가포르는 내 작업의 렌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싱가포르를 통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식민 전후사를 때론 줌인하듯 세밀하게, 때론 줌아웃하듯 거시적으로 접근해 보여준다.
=동남아시아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선 늘 고민이다. 역사의 짧은 한 시기를 보는 것과 긴 역사를 보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 한다. 여러 가지 것들을 합성해내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탈식민주의나 탈구조주의처럼 특정 역사적 사건을 맥락 속에서 살핀 뒤 그것을 잘게 쪼개서 다시 보는 거다. 이후 이 쪼개진 걸 다시 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데이터’라는 것 자체가 시간의 압축과 팽창이 아니겠나. 큰 크기의 영상을 크라우드에 업로드할 수 있는데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저장된다.
-동남아시아라는 정체성과 지역에 대한 질문은 계속되는 건가.
=한동안은 그럴 것 같다. <비평 사전>은 26개의 키워드다 보니 할 일이 굉장히 많다. 죽기 전에 이걸 다 다루지 못할까봐 걱정이다. (웃음) <만 마리의 호랑이들>만 해도 3~4년이 걸렸는데. 정체성이 뭐다, 라고 말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뭔지 질문으로서 의미가 있다. 26개의 키워드 모두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들이지만 대체로 ‘Shape Shift’, 즉 자기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들에 관한 얘기가 될 거다. 삼중 스파이, 유령작가처럼 자기 모습이 확실하지 않은 건데 그게 곧 동남아시아적인 게 아닐까.
-극장 상영용 영화 작업도 계획 중인가.
=지난 2~3년간 베를린에 거주하면서 컴퓨터를 통한 작업을 많이 해왔다. 그러면서 카메라 없이, 디지털로 영화적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에 집중하게 됐다. 영화 작업이 정말 많은 자원을 낭비하지 않나. 오히려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재활용하는 게 좋다고 본다. 파운드 푸티지 활용 등을 통해 미디엄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