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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우유 뺀 밀크셰이크
김혜리 2017-04-26

<파운더>

<파운더>의 가장 재미있는 대사와 이미지는, 맥도널드 형제가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개념을 발명하고 디자인한 과정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딕(닉 오퍼먼)과 맥맥도널드(존 캐럴 린치)는 공산품 조립라인처럼 분업화된 햄버거 조리 프로세스에 맞게 주방을 설계한다. 그리고 테니스 코트에 백묵으로 튀김기계, 그릴, 음료 스테이션 등의 배치도를 그리고 직원들을 투입해 실전 시뮬레이션을 한다. 인력 트레이닝은 물론 실제를 반영해 동선의 설계를 수정하는 이중목적의 리허설이다. 실화에 기초한 이 장면은 존 리 행콕 감독과 안무가 키키의 협력에 의해 일종의 ‘버거 발레’로 연출됐다. 성격은 판이하지만 쌍둥이처럼 합이 잘 맞는 두 형제는 농구 코치처럼 ‘선수’들을 지휘하고 관찰하며 초안을 수정해간다. ‘요식업계의 코언 형제’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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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댄서>의 대상은, 고작 20살에 영국 왕립발레단 솔로이스트로 뽑힌 걸로도 모자라 조연에는 부적절한 카리스마 탓에 곧장 수석무용수(principal)로 발탁된 우크라이나계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이다. 주인공이 아직 형성 중인 젊은 예술가인 까닭도 있겠지만 <댄서>의 핵심은 천재성의 해부가 아니다. 물론 <댄서>가 관객을 모으는 포인트는 스크린을 휘어잡는 폴루닌의 비범한 피지컬과 재능이다. 그러나 이 평이한 기록영화를 끝까지 지켜보도록 붙드는 화제는 폴루닌의 행적을 따르는 중에 더불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발레라는 예술의 그늘이다. “하루만 연습을 걸러도 통증이 심해서 쉴 수도 없어요. 포로가 된 기분이죠.” “발레는 4, 5살에 시작해 19살이면 교육이 완료돼요. 한발 물러서서 생각할 때가 되면 유년기는 다 지났고 다른 일은 할 줄 몰라요. 행여 몸 다칠까봐 할 수도 없고요.” 폴루닌이 느끼는 회의는 경주마의 그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나는 왜 춤을 춰야 하지? 그냥 잘하니까?” 폴루닌과 왕립발레학교 친구들의 인터뷰를 종합하면, 진로를 판단하기 이른 나이에 재능을 발견한 보호자의 결정으로 대개 춤을 시작한 무용가들은 슬럼프가 오면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더욱 번민한다. 무용단에 소속된 경우는,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와 별개로 낮은 보수와 과로, 아티스트라서 기대받는 창의성과 월급쟁이에게 요구되는 성실성의 이중굴레가 목을 죄기도 한다.

발레의 다른 특징은 퍼포먼스가 얼마간 정해진 규범을 따른다는 것이다. “재능이 너무나 큰 나머지 모든 것에 빨리 질리는 괴로움”이 어떤 경지인지 나로서는 짐작도 하기 힘들지만 폴루닌은 발레 레퍼토리를 깊이 파고드는 데에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분방한 표현 충동을 가진 예술가인 듯하다. 그를 오래 알았던 학교 관계자의 “(연습실에) 월요일에 가서 보고, 수요일쯤 다시 가보면 다른 퍼포먼스예요. 세르게이는 안무에 매번 뭔가 다른 걸 넣어요” 같은 표현은 영화배우에게 감독이 보내는 찬사와 비슷하게 들린다(과연 폴루닌은 <댄서> 이후 영화계에 진출해 최근 케네스 브래너의 앙상블 추리극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레드 스패로>에 출연했다).

영화의 본론과 별개로, 나는 감독과 인터뷰하는 폴루닌과 영국인 동료 발레리노들의 대조적 모습에 눈길이 머물렀다. 신이 편애한 조건과 능력을 타고난 천재 폴루닌은 언제나 벼랑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고, 본인의 감정을 명쾌히 표현하기 어려워한다. 여가 시간에 파티를 즐길 때조차 그는 쫓기듯 극단적이다. 반면 폴루닌의 재능에 결코 범접하지 못했던 발레학교 동기들은- 물론 남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질투의 흔적은 커녕 훨씬 여유롭고 성숙해 보인다. 상황을 객관화하고 개인의 문제와 무용계 일반의 경향을 연결한 코멘트를 주는 것도 그들이다. 요컨대 무용수로서 성공 이외에도 시야에 삶의 다른 부분이 들어 있는 인상이다. 이는 재능의 크기에 비례해 삶의 여타 영역이 희생된다는 일반론의 증거일까?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온 집안의 희생과 기대를 짊어진 자수성가형 천재와 그럴 필요가 없었던 서구 예술도들의 차이일까? 위대한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슈퍼 사이즈의 재능과 삶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관점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내 대답은 무엇일까? 아무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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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주인공이 일관되게 밉살맞은 영화도 오랜만이다. <파운더>의 주인공은 캘리포니아 샌 버나디노에서 햄버거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을 처음 연 맥도널드 형제가 아니라 마이클 키튼이 연기하는 맥도널드 프랜차이즈의 창시자 레이 크록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맥도널드라는 이름, 그리고 거대한 노란 아치는 요식업의 포드주의(Fordism), 속도와 이윤을 앞세우는 식당의 대명사지만 우리가 아는 맥도널드의 컨셉은 비즈니스맨 레이 크록의 것이었고 스피디 시스템을 발명한 맥도널드 형제는 뜻밖에도 레스토랑의 질과 합리성을 중시한 장인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고 <파운더>는 전한다. 딕과 맥, 맥도널드 형제가 고안한 햄버거 가게는 대단한 미식의 전당은 아니지만 저렴한 값에 균질한 맛의 한끼를 원하는 고객과 사업장과 동반 성장하려는 직원에게 모두 득이 되는 효율적 기계장치다. 이는 동네 훌리건들이 죽치고, 웨이트리스들이 성희롱을 피하느라 전전긍긍하는 그때까지의 햄버거 식당 문화를 바꾸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파운더>에 따르면 형제에겐 성공의 욕망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식당이 거기서 먹고 일하는 당사자들에게 어떤 장소였으면 좋겠다는 확고한 비전을 넘어서지 않는다. 솔직히 나라면 프랜차이즈로 부동산 재벌이 된 레이 크록이 아니라 맥도널드 형제에 관한 영화를 기획했을 것 같다. 뭐, 쓸데없는 푸념이다.

다시 말해 영화 속 맥도널드 형제는 오너의 개성이 살아 있는 지속 가능한 음식점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반면 크리에이티브 창시자를 적극 설득해 프랜차이즈망을 건설한 사업가 레이의 대조적 특징은, ‘빅 픽처’와 속도 강박이다.

영화에는 레이가 고속도로를 운전해가다가 마을마다 솟아 있는 교회 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레이는 딕이 그린 매장 외경 상상도의 노란 아치와 맥도널드라는 성(姓)의 보편적인 뉘앙스에 깊이 매혹된다(오늘날 우리가 크록 햄버거를 먹고 있지 않은 이유다). 그는 조촐한 햄버거 레스토랑을 가족의 가치를 대변하는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예배당으로 키우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이것이 맥도널드 형제가 미처 깨닫지 못한 패스트푸드의 본질이며 그것을 발견한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맥도널드 파운더라는 확신에 이른다. 왜 동네 식당이 교회가 돼야 하는가? 적어도 영화에 따르면 레이는 특별히 종교적이거나 가족적인 인물은 아니다. 교회가 맥도널드의 모델이 되는 이유는 모든 마을에 하나씩 있어서다. 즉, 무한한 이윤 증대 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작은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을 근시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영화는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는 레이의 습관을 부각한다. 어떻게든 남편을 도우려는 아내(로라 던)는 언제나 뒤처진 기분으로 남겨지고 사업 파트너 맥도널드 형제는 모욕감에 떤다. 자본을 빨리 축적하고 싶은 사업가 레이의 감각에, 그들은 느려터진 걸림돌이다. 적어도 식당 문턱 안의 일은 맥도널드 형제에게 결정권을 주겠다던 레이 크록의 약속은, 밀크셰이크 파동으로 금이 간다. 아이스크림 냉동고의 전기세를 줄이려는 시도가, 우유 대신 파우더를 쓴 밀크셰이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창작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약속하는 언론, 영화의 전주들에게도 비슷한 지점이 있을 터다. 마이클 키튼의 레이 크록은, 이윤을 추구할 뿐 아니라 이윤 증대의 속도와 팽창의 규모 자체에 매혹된, 자본주의를 의인화한 듯한 캐릭터다. 근래 비슷한 예로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조단 벨포트가 있다. 레이 크록의 명함에는 ‘설립자’(Founder)라는 직함이 또박또박 박혀 있었다고 한다. 일종의 의식적 강변이 아니었을까? <파운더>의 에필로그 자막은 레이의 사후, 그의 마지막 부인이 재산의 큰 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후일담이 누군가가 평생을 건 피조물을 가로채고 변질시킨 행위를 상쇄할 수는 없다.

<나는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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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도둑

티모시 스폴은 정치인 윈스턴 처칠, 화가 J. M. W. 터너, 영국 최후의 교수형 집행인 알버트 피에르포인트 등 많은 실존 인물을 연기해왔다. <나는 부정한다>에서 스폴이 연기한 데이비드 어빙은 현재 생존하는 역사저술가로, 나치의 의도적 유대인 학살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인종주의자이며 여성혐오자인 이 인물은, 최악의 인물도 내부로부터 소화해 인간성의 일환으로 표현하는 배우 티모시 스폴의 장기를 입증하는 캐릭터다. 관객은 어빙을 염오하면서도 그가 등장할 때마다 높아지는 스크린의 전압을 느낀다. 자긍심이 높은 나머지 스스로의 변호인으로 법정에 선 어빙은 영화 내내 대중을 선동하는 동시에 철저히 혼자다. 뜻을 같이하는 여러 법조인과 학자들이 팀워크를 이루는 피고쪽과 대조적인 면모다. <나는 부정한다>를 촬영하는 동안 상대편 변호인 역의 톰 윌킨슨은 극중 법정에서와 똑같이 티모시 스폴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말을 걸지 않아 동료 배우의 고립감을 부추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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