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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세월호를 기록해온 사진가들
정지혜 2017-04-17

세월호 참사의 현장을 기록해온 사진작가들이 있다.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세월호의 흔적들은 그들 각자에게도 끝없는 물음으로 남았다. 세월호 앞에서 사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재차 물어본다. 사진을 통해 세월호를 계속 상기하길 바라본다. 세월호를 온전히,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기록 사진들이 존재할 것이다.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 등을 통해 각자의 태도로 세월호를 카메라에 담아온 작가들 가운데 네명의 작업을 소개한다. 사진에 대한 작가의 코멘터리를 통해 3년 전 세월호와 지금 여기의 세월호, 그리고 세월호 이후에 대해 말하고 기억하는 시간이길 바란다.

2015년 4월 4일,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진행된 추모행사.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이 아이들의 영정을 들고 단원고에서부터 학생들의 통학로를 따라 걷는다. 아이들이 나고 자란 동네, 아이들이 뛰놀던 길에 이제 더이상 아이들은 없다.

2016년 1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하야와 탄핵을 외치던 광화문광장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세월호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한다면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고 SNS를 통해 더 많이 알려달라고 했다.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를 보며 학생들은 깊이 이 문제에 감정이입하는 듯했다. 한국 사회의 어른, 기성세대가 미래세대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것이다. 학생들은 기성세대에 그 책임을 물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죽음과 책임’은 어떤 의미일까. 전 세대가 고민해야 한다.

윤성희 작가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을 통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현장의 사진들을 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비롯해 노동현장을 기록했다. 오열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면서 누군가의 고통의 순간을 기록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혹시 내가 자극적인 이미지만을 좇은 건 아닌지 죄책감이 몰려온다. 세월호 같은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facebook.com/pictureinblue)

2014년 10월 4일 진도 팽목항의 밤. 부두에서 사고 해역 방향으로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세월호에 있는 아이들이, 세월호가 하루빨리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 같았다.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책임이 규명될 수 있을까’. 아무리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던 답답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평소에는 더없이 고요한 팽목항이지만 세월호 이후 그곳은 달라졌다. 새벽만 되면 컴컴한 항구에서 바다를 향해 원망의 울음을 터뜨리던 흐느낌이 들렸다. 물결치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치 세월호에 있는 아이들이 아우성치는 듯했다.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봤다.

2015년 4월 4일.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 앞 세월호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출발해 서울 광화문광장까지 아이들의 영정을 들고 걷고 또 걷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지던 때였다. 분위기는 더없이 침울했다. 하지만 유가족 분들은 더이상 움켜 쥘 것이 없었기에,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주용성 작가

세월호 참사의 현장과 단원고 희생 학생들의 빈방을 찍는 작업을 이어왔다. 세월호를 기록하며 사진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지난 2년여간 ‘미군 위안부’에 대한 사진 작업도 해왔다. 1970년대 국가가 나서서 이른바 ‘양공주’, ‘양색시’를 관리해온 정황이 드러난 만큼 이들의 역사를 더 알고 더 말해야 한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있는 동두천 몽키 하우스, 군산 아메리칸 타운,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다수 묻혀 있는 동두천 상패동의 무연고 공동묘지를 찾아 공간과 사람을 기록한다.(facebook.com/jooyongseong, instagram.com/jooyongseong)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처음으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 현장을 기록하고 있기도 했고 진도로 곧바로 내려갈 마음이 서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2014년 5월 9일 새벽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와대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유가족들과 마주했다. 자식의 영정을 들고 있는 부모를 찍는 일에 망설임이 컸다. 다른 한편으로는 밀양의 송전탑 투쟁을 포함해 수많은 투쟁 현장이 생각났고 유독 세월호 참사에만 더 슬퍼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2015년 새해, 김훈 작가가 <중앙일보>에 특별기고한 세월호와 관련된 글을 읽으며 내 안의 질문에 잠정적인 답을 내렸다. 글귀는 이러했다. ‘300명이 넘게 죽었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몸이 물 밑에 잠겨 있지만 나는 이 많은 죽음과 미귀(未歸)를 집단으로 한꺼번에 슬퍼할 수는 없고 각각의 죽음을 개별적으로 애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민이의 6만원, 물에 젖은 1만원짜리 6장의 귀환을 통절히 슬퍼한다.’ 나는 각각의 죽음을 개별적으로 애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2017년 4월 7일 목포신항에 육상 거치된 세월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일들이 이렇게 거대한 흔적이 돼 돌아왔다. 녹슬고 엉망이 돼버린 상처투성이 세월호를 본다.

정택용 작가

비정규직, 정리해고와 관련된 현장을 기록해왔다. 그 가운데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장을 6년간 찍은 사진들을 추려 <너희는 고립되었다-기륭전자비정규직투쟁 1890일 헌정사진집>으로 묶었다. 재능교육, 콜트콜텍,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관한 기록도 해왔다. 살기 위해 고공농성을 하고 한뎃잠을 자야 했던 이들을 담은 사진집 <외박>도 펴냈다.(mipaseok.com)

2014년 11월 1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은 계속된다는 의미와 더불어 예술가들이 자신의 연장을 내려놓고 이곳에서 만났다는 의미로 1차 ‘연장전’을 진행했다.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단원고 아이들이 앉았을 법한 책상들을 늘어놓고 그 위에 바닷물을 연상시키는 비닐 막을 덮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 한 책상 위의 비닐이 걷혔다. 순간, 돌아가신 분들도 생각났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분들에 대한 생각도 가시질 않았다. 죽음을 애도하고 진실을 향한 싸움이 진행되던 그 한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세월호 2주기 때 ‘기억식’이 열리던 안산 합동분향소 앞이다. 결국 진실을 밝히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각자가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는가의 싸움에 달린 게 아닐까. 참사 앞에서 시각매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떤 장면을 기억할 만한 장면으로 제출해내는 것일 것이다. 오랫동안 기억될 만한 풍경들이 더 많이 생산돼야 한다. 결국 동시대를 사는 사진가에게 요구되는 건, 사건과 풍경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고민이라 말하겠다. 사진은 결국 시간이라는 힘에 기댄다. 현세대가 죽은 뒤, 현실이 잊힐 만한 시기가 됐을 때 시각자료는 비로소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우린 아직 세월호라는 거대한 사건 위에 있다. 한발 떨어져 이 사건을 본다는 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나 얘기돼야 한다. 지금은 이 사건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홍진훤 작가

대상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사진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하나였다. 무자비한 개발의 흔적과 그것이 만들어낸 역사의 풍경이다. 세월호 참사 초기부터 안산 기억저장소와 연을 맺었고 기억저장소로부터 아이들이 떠난 빈방을 기록해두는 ‘빈방’ 프로젝트를 제안받아 실무를 맡았다. 세월호와 관련해 뭔가를 하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사진작가들에게 <4시간16분 동안의 전시>(사진가들이 각자가 찍은 사진을 들고 국회의사당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단식농성을 하던 광화문광장까지 걸으며 진행한 사진전이다.-편집자)를 제안했다. 운동이 아닌 예술의 방식으로, 집회가 아닌 고행의 의미로서의 전시였다. 이후 단원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도착지였던 제주도를 찾아 세월호의 흔적을 좇았다. 그 기록은 소설가 김연수 작가의 글과 함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로 묶여 곧 발행된다.(jinhw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