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헌재의 위헌정당해산 결정으로,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지난해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를 통해 정당 해산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통합진보당을 입에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이정희 전 대표 또한 지난해 <진보를 복기하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지만, 그동안 폐기됐거나 발의가 되지 못해 안타까운 진보 정책 11가지를 소개했을 뿐 정당 해산 과정에서 겪은 일이나 심정만큼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한달여 전 새 책 <이정희, 다시 시작하는 대화> 출간을 기념해 이정희 전 대표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다. 그러다가 며칠 전, 만나겠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정치에 민감해진 시기에 정치 외의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과 조금 더 숨을 고르고 대화하고 싶었다”는 이유와 함께. 인터뷰가 끝난 뒤 그녀는 “글을 쓸 때는 마음을 정리정돈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은 글과 다른 흔들림이 있더라. 그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출연한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김어준 총수가 “이정희가 나오는 적절한 타이밍 같은 건 없다”고 말했음에도 공개적인 자리에 나서기까지 많은 고민이 필요했을 것 같다.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진보 정책 중 버리지 말아야겠다 싶은 것들과 극복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대표였던 내가 혼자서라도 정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촛불혁명을 지켜보면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보정치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잘못한 것을 고백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기위해 정리가 필요하다 싶었다. 책을 쓴 것도 그래서다.
-촛불혁명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박근혜가 퇴진하면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 거냐고 얘기하던 청년 노동자들이 자꾸 생각났다. 박근혜 퇴진은 시작에 불과한데 그다음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우리는 답을 알고 있는가. 1987년 대학에 입학해 그해 6월 민주항쟁을 겪으며 세상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명령과 가치가 그동안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다가 이번에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구나 싶다.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는 상황에서 진보정치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 청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진보정치가 힘을 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의 1부 ‘한 시대를 보내며’는 통합진보당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로 시작한다. 통합진보당은 박근혜 정권이 자행한 종북몰이 때문에 해산됐는데도, 당시 대표로서 비례대표 경선 부정선거 논란으로 인한 당의 분열을 챙기지 못했던 일을 반성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는 국민들과 통합진보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를 좀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다. 진보정치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른 채 진보정치에 뛰어든 게 아니다. 국민들 또한 지난 17년 동안 진보정치가 어떤 흥망성쇠를 겪었는지 잘 안다. 그 과정에서 겪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벌어진 일에 대한 근본 원인을 밝혀낼 필요가 있었다. 정권이 종북몰이를 하고, 강제 해산 청구를 하고, 사건을 조작했다고 해도 내부의 붕괴가 아니었다면 진보정치의 쇠퇴까지 갈 일은 아니었다. 내부의 균열을 이기지 못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지난 19대 총선을 앞두고 당을 통합하고 야권이 연대하는 과정에서 진보정치가 필요한 노동현장을 찾기보다 당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더 신경 썼던 게 실책 중 하나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통합진보당은 큰 정당들이 살피지 않았던 여러 노동현장에 관심을 가지고 챙기지 않았나.
=진보정당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노동자, 서민들에게 집중하고 국민들에게 가까이 가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2012년 총선을 준비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점들이 많았다. 총선 기간 동안 당 내부의 감춰진 욕심, 오해, 감정적인 충돌이 맞물리면서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태가 일어났다. 그 일이 터지니 다시 극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당의 통합을 주도했고 당을 이끌던 사람으로서 이전 과정까지 살펴보게 되더라. 내 얘기와 생각을 고백하는 일이 대표로서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또한 통합진보당 해산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불어민주당은 2012년 6월 19대 국회가 개원할 때 경선 부정을 이유로 이석기, 김재연 의원을 자격심사에 회부하기로 합의했고(검찰 수사 결과 두 의원은 경선 부정과 아무 관련 없다고 확인되었다.-편집자), 두 의원에 대한 자격심사청구안을 새누리당과 공동발의했으며, 이석기 의원 체포 동의안에 대해 당론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야당에 대한 섭섭함과 아쉬움은 없나.
=박근혜 정권은 당시 야권 연대 및 공동 행동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계속 했던 것이고, 그것은 정권이 종북몰이를 한 결과다. 통합진보당과 함께 있으면 손해 보니까 안 되겠어, 같은 불안감과 위축감을 정권 차원에서 만들어냈다. 통합진보당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면 정권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니 일단 피하고 봐야겠다는 거다. 이 문제는 함께 의논하고, 비판이 이루어져야 하고,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감정을 많이 덜어냈는데….
-오히려 감정을 많이 드러내던데. (웃음)
=그렇게 봤다면 뭐. (웃음) 이 문제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시대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권은 왜 소수정당인 통합진보당을 강제로 해산하려고 했을까.
=박정희 정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청산 대상이었던 친일 세력들이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방법의 일환이었다. 분단 체제를 이용해 적대 의식을 고취시키고 불안감을 조성해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그게 박근혜 정권이 내세운 최대의 치적이었고, 탄핵을 당한 이후에도 자신의 치적으로 통합진보당 해산을 꼽았던 이유다. 박근혜 정권이 또 했던 것 중 하나가 역사 전쟁이었잖나. 친일 행위를 미화하려고 노력한 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기억에서 아버지(박정희)의 친일행적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가장 큰 사건은, 나와 마주 앉았던 지난 대선의 TV토론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 발언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도 작용했고, 정치보복 성격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문제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대한민국이 70년 만에 종북몰이에서 벗어날 시기가 되었다. 종북몰이 프레임에서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또다시 종북몰이라는 수렁에 빠질 것인가. 중대한 기로에 선 지금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를 통해 통합진보당 해산이 정권이 자행한 기획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만큼 재심이 필요해 보이는데.
=재심은 우리나라 사법구조에서 충족 요건이 까다롭지만, 핵심 관련자들의 물증이 나온 까닭에 이 사건의 내막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재심까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걸릴 문제니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나갈 생각이다. 무엇보다 종북몰이를 끝내기 위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일단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어낸 세력에 대한 정치적 평가 과정이 선거 때마다 필요하다. 둘째, 국정원과 종편과 우익단체가 정권의 종북몰이에 앞장서지 않았나. 국정원을 해체하고 종편의 편향보도를 엄격하게 감시해야 한다. 셋째, 내부의 적에 대한 불안감과 증오에서 탈피해 ‘종북몰이의 피해자를 이제 혼자 두지 않겠어’라는 국민적 차원의 연대의식이 필요하다.
-책의 2부 ‘새로운 시대, 동행을 위하여’에서는 다음 세대의 진보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다루는데. 새로운 시대에서 진보정책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언제 무언가를 바꿔야겠다고 나설까. 돈? 조직의 지시? 아니다. 사람은 자존심이 상하거나 무시를 당하거나 우리 아이들도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직접 나선다. 사람은 자존감 없이 살기 어려운 존재다. 정치는 국민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시켜줘야 한다. 진보정치의 역할은 국민들이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주권자가 될 수 있도록 손에 무기를 쥐어주는 것이다.
-2부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먼저 출간된 <진보를 복기하다>와 함께 읽으면 유익할 것 같다는 것이다.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11가지를 소개한 책인데.
=통합진보당이 해산됐지만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의 땀과 수고가 들어간 진보정책만이라도 살려주고 싶었다. 나는 이제 이 정책들을 실현할 수 없지만, 다른 누군가가 이 정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기를 국민들에게 주었으면 싶었다.
-기업살인처벌법, 노동관계법, 국민기초식량보장법, 물, 전기, 가스 무상공급제, 종편퇴출법, 국정원해체법, 통상절차법, 4대강 복원법, 대체복무법, 차별금지법, 국민참여예산제, 국민소환법 등 진보정책 11가지는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을 만큼 공감이 컸다. 직접 나서서 이 정책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그 생각이 강했으면 나중에 전업정치에 복귀하면 직접 해야지 하고 묵혀뒀을 거다. (웃음) 그런데 이 정책들은 내 것이 아니니까.
-전업정치에 복귀할 마음은 전혀 없나.
=누구나 살면서 정치활동을 한다. 전업정치를 할 수 없는, 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정치가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 점에서 나 또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인간이다
<진보를 복기하다>와 <이정희, 다시 시작하는 대화>
이정희 지음, 들녘 펴냄
두권의 책은 동전의 앞뒤 같다. 먼저 출간된 <진보를 복기하다>는 앞에서 밝혔듯이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11가지를 자세하게 소개하는 책이다. 이중에서 노동관계법을 보완해 <이정희, 다시 시작하는 대화>의 2부인 ‘새로운 시대, 동행을 위하여’에 더 상세하게 다뤘다. 실례를 들어가며 친절하게 소개하므로 낯선 이름의 정책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정희, 다시 시작하는 대화> <진보를 복기하다> 순서로 읽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