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속담처럼 갈등에 동원되는 우연에는 상대적으로 너그럽지만, 문제해결에 동원되는 우연에 예민하게 가능성을 따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풀이과정을 자신의 고민에 대입해보게 되기 때문은 아닐까? 현실에는 내 고민을 해결해주려고 우연을 주관하는 작가 따윈 없다.
드라마에 숱하게 반복되는 ‘엿듣기’도 따지고 보면 정보 취득 행위인데 그렇게 얻어진 정보가 오해와 갈등의 재료가 될 뿐 해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도 우연이 문제해결에 개입하면 설득력을 잃기 때문이다. SBS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보여주는 신사임당(이영애)의 활약이 종종 시트콤화되는 순간들에도 대부분 우연이 겹쳐 있다.
사임당이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운평사에서 종이를 만들던 유민들이 몰살당했다는 회한 섞인 고백을 하는데 마침 과거 사건에 연루된 노인이 이를 엿듣는 장면을 보자. 이미 수차례의 암시가 있어 문제의 노인이 또 우연히 출몰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드라마틱한 연출을 위해 이전까지 병이 깊어 움막에서 지내던 노인이 산 중턱 바위 뒤에 숨어 있다 갑자기 나타나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장면은 ‘참 편리하네’라는 쓴웃음으로 이어진다.
현대의 사임당 격인 서지윤(이영애)이 발견한 ‘수진방 일기’로 더듬어가는 과거 사임당은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의 선택을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말하지만 편리한 우연이 닦아놓은 길에 선 사임당의 목소리는 자서전의 상투적인 목차처럼 따분하게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