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해외에서 지명도가 그리 높지는 않다.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적도 없고 유럽이나 미국의 비평가들에게 열렬한 찬사를 받거나 논쟁의 대상이 된 적도 거의 없다.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구로사와 아키라 그 다음 세대의 오시마 나기사와 이마무라 쇼헤이, 스즈키 세이준, 기타노 다케시 등 일본영화의 거장들을 나열해보면 후카사쿠 긴지의 이름이 들어갈 곳을 쉽게 찾을 수 없다. 회고전이 열린 것도 기껏 2000년 로테르담영화제 정도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미이케 다카시나 구로사와 기요시에게도 주어진 영광이라면, 전후 일본영화사의 산증인 후카사쿠 긴지에게는 너무 늦은 회고전이다.
흥행과 비평 모두 만족스럽게, 꾸준하게
후카사쿠 긴지의 나이는 71살. 지금도 여전히 영화감독으로 ‘활동’중이다. 이마무라 쇼헤이, 스즈키 세이준도 요즘 신작을 내고 있지만, 후카사쿠 긴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후카사쿠 긴지는 자의든 타의든 조금도 쉰 적이 없었다. 오시마 나기사도, 이마무라 쇼헤이도, 스즈키 세이준도, 심지어 한때 최고의 흥행감독이었던 구로사와 아키라도 일본영화의 침체와 함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다. 반면 후카사쿠 긴지는 흥행과 비평 어디에서나 만족스럽게 꾸준한 걸음으로 대로를 걸어왔다. 후카사쿠 긴지는 메이저에서 끊임없는 성공을 거두어온, 보기 드문 거장이다. 후카사쿠 긴지가 저평가를 받아왔다면, 아마도 이유는 그것이다. 언제나 메이저에서, 상업적인 장르영화를 주로 만들어왔기 때문. 후카사쿠 긴지의 대표작은 도에이 야쿠자물의 변주인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였고, 지난해 일본사회를 들썩이게 한 <배틀로얄>도 중학생의 살인게임을 다룬 액션영화였다.
후카사쿠 긴지는 40년, 조감독 생활까지 합한다면 거의 50여년의 세월을 영화현장에서 살아왔다. 후카사쿠 긴지는 하워드 혹스나 존 포드처럼 스튜디오의 ‘규격’ 안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거장이었다. 후카사쿠 긴지는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주류영화계의 안과 바깥 모두에 충격을 주어왔다. 1930년에 태어난 후카사쿠 긴지는 53년 도에이 영화사에 입사한다. 당시는 스튜디오 내부에 엄격한 도제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었고, 후카사쿠는 약 40여편의 영화에서 조감독을 거치고 1961년 감독으로 승진한다. 하지만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감독과 배우들은 한 영화사에만 전속으로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사가 원하는 영화에 출연하고 또 감독을 맡아야만 했다. 후카사쿠 긴지 역시 도에이의 지시대로 잘 팔리는 장르영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데뷔작은 도에이의 방계회사인 뉴도에이사에서 제작한 <후라이보 탐정>(風來坊探偵) 2부작이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닛카쓰 영화사의 무국적 액션영화를 모방한 영화였다.
장르영화로 스타트를 끊은 후카사쿠 긴지는 단지 범죄자들의 무용담을 그리는 액션영화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능력을 인정받아 도에이 본사로 등용된 후카사쿠 긴지는 <명예로운 도전>(1962)으로 사회파 액션에 도전한다. 철강업계지의 기자인 구로키는 한 대기업이 동남아시아의 독재정부에 무기를 수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배후에는 GHQ의 전직 첩보부원 다카야마가 있었다. 구로키는 전후 다카야마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구로키는 음모의 전모를 파헤치려 하지만 신문사도 경시청도 침묵을 지키기만 한다. <명예로운 도전>이 시작하면, 회색의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검은 선글라스를 낀 구로키의 모습이 나온다. 첫 장면부터 구로키의 삐딱한 반골정신이 강하게 풍기면서 영화를 주도해간다. 후카사쿠는 일반적인 서스펜스 드라마의 틀에 무기산업의 부활과 CIA의 암약 같은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깔면서 전후 민주주의의 환상과 실망을 영화 전체에서 드러낸다. <명예로운 도전>은 전쟁의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둔다.
사회의식 강한 액션, 다이내믹한 묘사
후카사쿠 긴지는 <명예로운 도전>의 성공 이후, 사회의식이 강한 ‘사회파 액션’영화를 연달아 선보인다. 1949년에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쟈코만과 테츠>(1964)는 북해도의 어장에 들어간 무법자 쟈코만이 어부들을 도와 그 지역을 지배하는 테츠와 싸우는 이야기다. 후카사쿠 영화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다이내믹한 묘사’가 일품인 영화. <늑대와 돼지와 인간>(1964)은 야쿠자영화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다카쿠라 겐이 출연했다. 슬럼가에서 자라나 야쿠자, 갱단원 등이 된 무뢰한 삼형제는 서로를 물어뜯으며 지독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싸운다. 거기에는 정의도, 형제애도, 의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법칙을 무시하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협박>(1966)은 한 샐러리맨의 집에, 세계적인 암 권위자 사카다박사의 손자를 유괴한 범인들이 도망쳐오면서 벌어지는 스릴러물이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작품들은 ‘계급투쟁의 관점’을 드러내면서, 타락한 도시의 낙오자들이 방황하는 슬럼가와 암시장이 그려진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은 극단적인 혼란과 절망뿐이다. 그러나 후카사쿠 긴지는 하층민의 폭력을 일견 긍정적으로 그려낸다. 그들의 폭력은, 그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삶의 방식인 것이다. 이 영화들에서 후카사쿠는 폭력의 분출을 역동적으로 묘사하는 액션장면에서 자신의 시각적 스타일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후카사쿠 긴지의 첫번째 야쿠자영화는 67년에 만든 <해산식>이다. 전형적인 도에이 야쿠자물. 후카사쿠 긴지는 그 밖에도 다양한 장르영화를 만들어낸다. <쿠로토카게>(1968)는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미시마 유키오가 희곡으로 옮겼던 작품을, 62년에 이어 두번째로 영화화한 것이다. 괴도 쿠로토카게의 활약을 그리고 있고, 미시마 유키오도 특별 출연했다. <쿠로토카게>가 성공을 거두자 일종의 외전인 <흑장미의 관>(1969)도 만든다. 미국 하청을 받은 SF물 <감마 제3호 우주대작전>(1968), 좌익계 독립프로덕션 신성영화가 제작한 <당신이 젊은이라면>(1970) 등을 만들면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듭한다.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다룬 할리우드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 참여한 뒤, 후카사쿠 긴지는 나오키상을 받은 소설 <펄럭이는 군기 아래>의 판권을 사서 신도 가네토에게 시나리오를 맡긴다. <펄럭이는 군기 아래>는 72년 신성프로와 도호의 공동제작으로 만들어진다. 2차대전 말 뉴기니 전선에서 한 일본군이 처형된다. 전후 그 소식을 들은 병사의 부인은,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남편의 동료들을 찾아다닌다. 그 진상은 처참한 것이었다. 식량이 바닥난 일본군은 인육을 먹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동료들까지 희생되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 남편은 비열한 행동을 거듭하는 상관을 살해한 것이었고, 일본군은 그 사실을 감추려했다. <펄럭이는 군기 아래>는 일반적인 사회파영화의 ‘고발’을 뛰어넘어, 추악한 인간의 본성을 혐오하는 황량한 감정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영화의 일부 내용은 이후 하라 가즈오 감독의 다큐멘터리 <가자, 가자 신군> 속에 일부 차용되기도했다.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로 연출력 절정에 올라
다양한 작품을 만들며 공력을 쌓아가던 후카사쿠 긴지는 73년 <의리없는 전쟁>의 연출을 맡는다. <의리없는 전쟁>의 원작은 히로시마 야쿠자 항쟁의 중심인물이었던 한 야쿠자가 <주간 산케이>에 연재한 실록이었다. 도에이는 <의리없는 전쟁>의 성공을 미리 예감하고, 제작 직전에 시리즈화를 결정했다. <의리없는 전쟁>으로 대스타가 된 스가와라 분타는 1편의 마지막에 살해당하는 역을 맡기로 했지만, 시리즈 결정 때문에 모든 시리즈에 출연하는 주연으로 바뀌었다. 당시 도에이는 한때 융성했던 야쿠자영화가 주춤하는 듯하자, 야쿠자영화의 새로운 노선을 찾고 있었다. 일반적인 야쿠자영화(任俠映畵)는 의리와 인정을 가진 남자들의 멋과 폭력을 한껏 살린 영화였지만, 70년대 들어서면서 관객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후카사쿠 긴지는 <의리없는 전쟁>에서 남자들의 멋진 세계가 아니라, 모책과 배신이 넘치는 피의 항쟁을 그려냈다. 전형적인 야쿠자영화의 인물들은 탐욕, 두려움, 저열함이 혼재된 사실적인 인물로 바뀌었다. <의리없는 전쟁>의 히트로 도에이는 야쿠자영화의 새로운 노선을 ‘실록물’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영화계는 침체에 빠져들고 있었고, 도에이는 메이저 영화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혈안이었다. 미술비를 절약하기 위해 시대고증은 대충 넘어가고, 한명의 배우를 같은 영화의 다른 장면에 다른 배역으로 등장시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의리없는 전쟁>은 도에이사를 대표하는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B급 회사의 저열한 의식을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의리없는 전쟁>에서 야쿠자가 되는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거리에서 음식을 훔치다가 사람을 죽이기도 한 이들이다. 그들에게 범죄는 필연적인 선택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도덕이나 이성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영화에서 흔히 묘사되는 범죄자의 고상함이나 의리 같은 것은 없다. 대의를 위해 죽어간 메이지 시대의 인물들과도 다르다. 다이쇼와 쇼와 시대의 젊은이들은 ‘대의’라는 달콤한 유혹에 홀려 위선적인 ‘대동아전쟁’에 끌려갔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천황은 항복선언을 했고,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상층의 인사들은 어느새 미국에 붙어 있었다. 군대에서 돌아와 야쿠자가 된 젊은이들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전후의 야쿠자 세계에는 의리도, 대의도 없다. 후카사쿠 긴지는 그 비정한 지옥도를 선굵은 액션장면과 함께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로 꼼꼼하게 잡아낸다.
군인에서 야쿠자로 변신했던 이들이 야쿠자 항쟁을 통해 욕망의 과열로 치닫는 광경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 <의리없는 전쟁>에 이어 <의리없는 전쟁-히로시마 사투>에서는 막 조직원으로 발탁되어 야쿠자 세계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전이 벌어진 뒤,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의리없는 전쟁-대리전쟁>은 더욱 큰 야쿠자 조직을 끌어들이며 벌이는 대리전쟁을 그려낸다. <의리없는 전쟁-정상작전>에서는 서일본 지역의 패권을 노리는 명석조와 신화회의 항쟁이 심해지자, 시민들의 비판이 심각해진다. 경찰은 야쿠자 조직을 소탕하는 정상작전을 시작한다.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는 74년 <의리없는 전쟁-완결편>으로 마감한다. 2년 사이에 무려 다섯편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도에이는 야쿠자와 마찬가지로,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시리즈가 마감된 74년 다시 후카사쿠 긴지에게 <신 의리없는 전쟁>을 만들게 한다. 계속해서 후카사쿠 긴지는 <의리없는 전쟁>의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외전으로 북규슈가 무대인 <신 의리없는 전쟁-조장의 목>(1975), 오사카를 무대로 <신 의리없는 전쟁-조장 최후의 날>(1976)을 연출한다. 3년간 무려 8편의 시리즈가 이어진다. 60년대의 후카사쿠 긴지는 폭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청춘을 전후의 사회상과 연관지으며 그려왔다. 그 모든 것은 <의리없는 전쟁>에 집대성되고,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와 75년에 만든 <자금원강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야쿠자물 혹은 액션물에서 후카사쿠 긴지의 연출력이 거의 완벽한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빈번한 핸드헬드와 극단적인 앵글을 활용한 박력넘치는 영상과 정지화면과 문자의 사용 등이 인상적인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는 누벨바그의 영향도 지적된다. <의리없는 전쟁>은 다큐멘터리적으로, 별다른 과장없이 진행되지만 보다보면 히로시마의 거리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막다른 골목에서 토해내는 그들의 폭력과, 운명적으로 맞이하는 ‘개죽음’은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준다. 비정한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가 토해내는 강력한 에너지는, 후카사쿠 긴지만의 고유한 스타일이었다.
시대극, SF, 판타지… 그리고 <배틀-로얄>
<의리없는 전쟁> 이후의 일본 스튜디오는 추락 일색이었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붕괴했고, 배우와 감독은 전속에서 풀려났다. 공동 제작이 많아지고, 메이저의 잘 팔리는 장르 일색이 아니라 독립 프로덕션의 다양한 영화들이 선을 보인다. 그 시기를 맞춰 후카사쿠 긴지는 다양한 장르로 눈을 돌린다. 시대물인 <야규일족의 음모>(1978), 멸망 뒤의 세계를 그린 SF물 <부활의 날>(1980), 전국시대가 배경인 판타지물 <마계전생>(1981) 등을 만들던 후카사쿠 긴지는 영화 제작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인정(人情)희극 <가마타 행진곡>(1982)으로 호평을 받는다. 후카사쿠 긴지가 ‘패밀리 액션영화’라고 주장하는 <가타쿠의 사람>(1986) 역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을 거둔다. 이 두편의 영화로 후카사쿠 긴지는 ‘액션’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소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다룬 드라마도 능숙하게 연출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후카사쿠 긴지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모든 것을 습득한, 숙련된 장인이었던 것이다. 그뒤에도 후카사쿠 긴지는 다이쇼 시대 예술인들의 사랑과 예술혼을 그린 <꽃의 반란>(1988), <쥬신구라>와 <요쓰야 괴담>을 뒤섞어 청춘 러브스토리로 만든 시대 공포영화 <쥬신구라 외전 요쓰야 괴담>(1994), 전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오모챠>(1999) 등을 발표한다. 80, 90년대의 후카사쿠 긴지는 여전히 거장이었고, 여전히 흥행감독이었다. 2001년에 만든 <배틀로얄>은 후카사쿠 긴지가 어떻게 주류영화계의 흥행감독이면서도, 거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배틀로얄>, 그 폭력과 피와 결핍의 아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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