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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서늘하게 조여오는 긴장 - 박훈정 감독
장영엽 사진 오계옥 2016-12-26

전날 밤을 하얗게 지새운 뒤, 초췌한 몰골로 새벽녘 창가를 바라보고 있는 양복 차림의 남자. 그리고 그 순간, 사무실에서 피곤에 찌든 얼굴로 업무를 보고 있는 또 다른 남자. 신작 <V.I.P.>(제작 영화사 금월·공동제작 페퍼민트앤컴퍼니·제공/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를 준비하며 박훈정 감독이 떠올렸던 이미지라고 한다.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딜레마는 박훈정 감독이 오랫동안 주목해왔던 관심사였다. 용의자로 지목된 한 남자를 두고 한국 국정원과 경찰, 북한 보안성과 미국 CIA가 얽혀드는 <V.I.P.>는 박훈정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정치와 관계의 딜레마가 가장 큰 폭으로 확장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국가 권력기관들의 갈등과 충돌을 조명하는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권력기관 사이의 이해관계와 정치, 그로부터 발생되는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과거에도 국가 기관들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지 못해 결국 스스로 발목을 잡히는 사건들이 종종 있었고, 또 조직에 속한 각각의 사람들이 나쁜 건 아닌데 상황에 의해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

-과거의 사건이라면.

=영화의 모티브가 된 건 수지 김 사건(1987년 1월 홍콩에서 한국 여성 수지 김이 남편에 의해 살해되자, 국가안전기획부가 수지 김을 북한 공작원으로 몰아 북한의 공작으로 조작한 사건.-편집자)이다. 이 사건은 한동안 조용히 묻혀 있다가 10여년 만에 그 진상이 밝혀졌다. 이처럼 과거의 잘못이 현재 시점에서 다시 조명될 때,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건 과거의 관계자들이 아니라 현재의 조직원들이다.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수습해야 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일원들은 각각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 그런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북한의 주요 인물이라는 발상이 흥미롭다.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인물이려면, 우리이면서도 우리가 아닌 존재가 필요했다. 한국에 있어서는 북한이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더라. 우리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미국과 중국을 함께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대이니까. 오직 한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정이었다고도 생각한다.

-용의자로 지목되는 북한의 ‘V.I.P.’ 김광일이라는 인물의 표현 수위가 굉장히 세다. 이 역할에 이종석을 캐스팅한 이유는.

=말 그대로 ‘타이틀롤’이잖나. 그래서 정말 ‘V.I.P.’라는 말에 어울릴 만한 외모를 원했다. 어려서부터 손에 흙 한번 묻혀본 적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발밑에 있다고 생각할 법한, 중세 봉건 영주의 외동아들 같은 느낌이랄까. 이종석 배우는 외형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귀족적인 이미지와 가장 맞아떨어지는 배우였다. 워낙 배우로서 위험부담이 큰 캐릭터라 처음에는 캐스팅을 좀 망설였는데 오히려 본인이 이 역할에 큰 열의를 보여줬다. 광일은 북한에서 아버지보다 당 서열이 높은 사람들 외에는 노예나 하인 취급을 하는 인물이다보니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평소에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인 이종석 배우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 웃음 대신 서늘하거나 심드렁한 표정을 주문하고 있다.

-한국의 국정원과 경찰조직, 북한 보안성과 미국 CIA가 등장한다. 첩보요원들 사이의 ‘정치’가 서사의 중요한 축이 될 것 같다.

=(내가 시나리오를 쓴)<부당거래>가 경찰과 검찰, 그리고 건설 마피아 사이의 ‘아사리판 정치’를 다뤘다면 <신세계>는 깡패들이 넥타이 매고 정치하는 얘기였다. 이번 영화에서는 그 판이 좀더 확장돼 국가들끼리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로 나아가게 된 것 같다. 인간이 셋 이상 모이면 정치를 한다지 않나. 나는 정치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정치적인 관계망에 지속적으로 관심이 가는 것 같다.

synopsis

북한에서 온 V.I.P.가 한국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의 이름은 김광일(이종석). 특별수사팀에 합류한 경찰 채이도(김명민)는 직감적으로 광일이 범인일 거라 확신한다. 한편 국정원 직원 박재혁(장동건)은 대미, 대중 관계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광일을 경찰에 앞서 확보해야 한다. 여기에 광일을 찾아 북에서 내려온 보안성 공작원 리대범(박희순)의 사연도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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