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거지, 20살 청춘이라는 거.
내가 가진 속도와 세상의 속도가 맞지 않아서 힘들고 애타고, 소중한 시간들이 덧없이 흘러가는 꼴을 보고 견뎌야만 하는…. 질풍노도의 스펙터클 어드벤처가 펼쳐져야 마땅할 인생의 황금기에 모험이라 해봐야 고작 메케한 기침에 메슥거리는 속을 견디며 첫 담배를 배우는 일, 깡소주와 한판 대결을 벌인 뒤 길바닥에 나뒹굴어 보는 것. 그리고 친구네 집에 며칠 머물다가 대부분 제발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가출. 좀 논다는 애들하고 한번쯤 어울려보는 것. 고작 이런 것들이다.
지나간 청춘을 돌이켜보는 일은 분하고 원통하고 억울할 따름이다. 모든 청춘은 유보되었다. 잠시 맡겨둔 고양이처럼, 유보된 것이라면 언젠가는 돌려받아야 할 것인데 한번 유보되고 저당 잡혀놓은 청춘은 그걸로 끝이다. 다시는 돌려주지 않는다. 모든 청춘은 그렇게 써보지도 못하고 유실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이팔청춘이었을 때, 내 심장은 스포츠카 엔진처럼 항상 으르렁거렸고 세상은 농구공 정도의 크기라서 하루빨리 통통 튀겨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꿈은 얼마나 많았던지 취미란에 ‘공상’이라고 쓰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렇다. 공상이었다. 스무살이 되는 시점에서부터 거의 모든 꿈은 공상으로 분리수거되고 말았다. 세상은 이 풋내기들을 길들이기에 아낌없이 혹독했고 비정하고도 냉담했다. 우리의 혈기왕성함과 부풀 대로 부푼 기분에 대해서 무뚝뚝함과 따분함과 지독한 권태로 대해주었다. 모든 선배들과 선생님과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세상이 얼마나 재미없고 별 뾰족한 수 없는 것인지를 알려주려고 총공세를 퍼부었다. 우리는 어리둥절 포위당한 채로 그렇게, 빳빳한 세뱃돈 같은 청춘을 화끈하게 써보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반납해버리고 말았다.
70년대 후반에 중학생이던 나는 기술 선생님이 “우리나라는 지금 선진국이 됐다”라고 말하는 것을 고스란히 믿었다. 고작 변두리 중학생 주제에 믿을 수밖에. 그리고 누구나처럼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남은 10대 시절을 코피로 혈서를 써가며 송두리째 갖다 바쳤고, 그렇게 어렵게 대학생이 되어서는 정말 허탈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한심한 전공 수업을 참아내었다. 그래도 믿었다. 이렇게 따분한 걸 고뇌하는 것이 청춘이라고, 갑갑하고 답답하고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한 것이 ‘자아가 불완전한’ 청춘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나비가 되기 위한 번데기 시절의 고통이라고….
스물여섯 되던 해에 처음으로 외국이란 데를 갔다. 그것도 선망하던 유럽이나 미국도 아닌 키 작고 쩨쩨하고 비겁한 쪽바리들의 나라라고 배웠던 일본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충격과 모종의 배신감과 까마득하게 줌아웃되는 내 청춘을 보면서 나는 까무러칠 뻔했다. 속았다. 속았다. 속았다. 나는 개구리였다. 우물 안의 개구리. 그리고 내 청춘은 고치 속에 박제된 채 이미 쫑났음을 알았다.
언젠가 사막에 가게 되면 금발 머리의 작은 소년을 만나게 될 거라던 당부도 잊지 않고 있었다. 소년은 양을 그려달라고 할 거라고…. 그 비행사의 당부를 잊지 않으려고 했건만 그 뒤로 20년이 지날 동안 나에게는 사막에 갈 기회가 한번도 오지 않았다. 더욱 참담한 것은 이제는 사막에 가게 되더라도 그 왕자 행세를 하는 녀석은 결코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막에 가보지도 않고 알게 되는 것. 대부분의 꿈들이 그렇게 휘발되어버렸다. 해보지도 않고 가망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높이 나는 갈매기가 멀리 본다는 말 따위는 쓴 웃음으로 지울 줄 알고 낮게 날면서 재빠르게 먹이를 낚아채는 방법이나 하나둘 익혀가고 있다.
청춘아. 우리가 품었던 공상은 공상이 아닐 수도 있었다. 문학의 밤을 열었던 그 많던 문학 소년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경복궁 향원정을 둘러싸고 풍경화를 그리던 소년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최루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양심과 예술 사이에서 번민하던 친구는 요즘 어떻게 지낼까? <라디오와 모형>이라는 잡지에 자신의 발명품 설계도를 보내던 친구는 지금은 뭐하고 사는지…. 잠시 맡겨두었다가 영영 되돌려받지 못하고 소식이 끊겨버린 고양이의 안부처럼, 잠시 유보되었다가 영영 떠나버린 내 청춘은 지금 어디쯤 떠내려가고 있을까? 김형태/ 황신혜밴드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