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갇혀버린, 내가 강화하고 있는 사회구조에 맞서기란 너무 어려웠다.’ 에머 오툴의 <여자다운 게 어딨어>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여성 혐오 살해가 벌어지고, 거대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보자고 모인 광장에서는 성차에 따른 혐오 발언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마땅히 ‘나쁜’ 페미니스트여야만 한다.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는 결과론적인 말 따위는 쓸모없다. 사회적 편견 때문이든 개인의 경험에서든 각자가 만들어둔 ‘범죄 가능형 프로필’로 폭력을 예방하겠다는 생각은 가장 손쉽고 가장 안일하며 위험한 대처법이다. 여성을 향한 혐오와 폭력의 언사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러니 그런 프로파일링이 다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누구를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지 절대 알 수 없다’는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쁜’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도덕적 평가로서의 ‘나쁘다’는 게 아니다. ‘완벽하게 훌륭하지 못한’, ‘충분하지 않은’ 부족한 상태로서의 나쁨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고, 살아남아서도 내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데 나쁜 게 대수인가. 착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주, 좋다고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겠다(아니, 이걸 왜 내가 매번 증명하며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 에너지가 얼마인가). ‘나쁜’ 여자들의 예를 찾아봤다. 그런데 이거 참. 때때로 ‘나쁜’ 여자들은 교도소에 가 있더라.
프랑스의 여성감독 오드리 에스트루고의 <뷰티풀 레이디스>(2015)는 ‘여성이 직면한 각종 폭력의 실태 보고서’라고 이름 붙여도 좋겠다. 영화는 2012년 프랑스 여성 자클린 소바주가 47년간 남편의 폭력과 남편의 자녀 성폭행에 노출된 삶을 살다 남편을 살해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녀는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정당방위라는 논쟁 끝에 올해 1월 특별사면됐다. 영화는 자클린 소바주와 비슷한 사연으로 여성 교도소로 온 여성들의 이야기다. 수감 여성들이 여기까지 올 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감옥행, 아니면 죽음. 그녀들의 사연을 잠깐 살펴보자. 10년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아니타(수잔 클레망)는 남편을 죽였다. 삼촌에게 강간당하고 가출한 진도, 강제 결혼 이후 아이를 낳고 살다 남편을 피해 도망쳐 성매매업소에서 일한 린다도 있다. 이들 여성 범죄는 ‘친밀한’ 관계 내의 남성들이 원인 제공자였다. 이 정도 수준이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페미니스트 레베카 솔닛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9초에 1명 꼴로 여성은 폭력을 당하고 여성의 3분의 1이 성폭력을 겪는다. 한국여성의 전화에만 들어가봐도 2015년 가정폭력 상담 건수에서 배우자가 폭력의 가해자인 경우가 전체의 83.3%로 가장 높다(전 배우자까지 포함하면 수치는 더 높아진다). 피해자의 성별을 보면 여성이 99.5%다.
<뷰티풀 레이디스>가 폭력 앞의 여성에 대한 보다 흥미로운 실태 보고서가 되는 데는 여성들 내부의 인종, 계급 차에서 오는 차별과 그들 안의 폭력성을 영화가 모른 체, 혹은 없는 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구한 운명 탓을 하면서 ‘나쁜’ 여자들이 됐다며 그녀들을 섣불리 동정하지도 않는다. 마틸드(소피 마르소)와 같은 방을 쓰는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 칸테는 상당한 악질이다. 마틸드에게 강간 위협을 일삼고 동료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자식을 살해한 마르트(앤 르 니)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외부와 연락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돈을 뜯어낸다. 관계에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상대의 취약한 고리를 붙잡고 상대를 속여먹는다. 영화는 여성 교도관들과 수감자들 간의 갈등도 다루지만, 교도관들 사이의 균열도 잊지 않고 그렸다. 아랍계 여성 교도관이 아랍계 수감자에게 “나는 아랍인이지만 다르다. 싸잡아 말하지 말라”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자, 상사인 흑인 여성 교도관은 “그놈의 출신타령, 인종차별 좀 그만하라”고 따끔하게 경고한다. 교도관들 내부에서 서로에게 눈치를 주는 방식은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결함투성이인 인간은 모두가 조금씩은 인종차별주의자’이지만 ‘나는 인종차별적 비밀을 공유할 때만 한편이 되는 게임에는 관심이 없다’고 선을 긋지 않던가. 게다가 영화는 이들 범죄자들의 성적 욕망까지도 슬쩍 건드린다. 마틸드와 아니타가 ‘우리 아직 (섹스를) 할 만하다’며 왁자하게 웃으며 각자의 자위를 즐길 때가 있다. 폭력의 잔혹함과 성적 욕망의 흥분이 뒤섞인 이 감옥이야말로 규정이 불가한 온갖 감정들이 꿈틀대는 인간의 민낯 같다.
섹슈얼한 장면과 폭력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오드리 에스트루고 감독의 세심한 태도가 엿보인다. 마틸드를 괴롭힌 칸테를 교도관이 끌고나갈때,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마틸드의 얼굴만 한참 비출 뿐 마틸드를 위협하는 건너편의 칸테는 보여주지 않는다. 후반, 마틸드가 교도관의 부당한 처우에 극렬히 저항할 때도 카메라는 인물 가까이 가길 거부하고 멀찍이서 위협적인 공기를 전하곤 한다. 우리가 봐야 할 장면은 폭력 대 폭력의 대결이 아니라 폭력 이후 남겨진 이들의 얼굴이라는 것 같다. <뷰티풀 레이디스>는 감독뿐 아니라 배우와 스탭 대다수가 여성들이다. 벡델 테스트의 조건(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2명 이상 있나, 이들이 대화를 나누나, 그 주제가 남성주인공에 대한 것이 아닌가)만 놓고 보자면 단연 ‘여성영화’다. 지난해 한국에서 1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22편의 영화 가운데 여성감독의 연출작은 한편도 없었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은 단 8편이었다.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에서는 좀처럼 만들어지기 어려운 영화다.
<뷰티풀 레이디스>는 충격적인 장면을 종장에 배치해뒀다. 흑인 여성 교도관이 마틸드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과 나의 가장 큰 차이가 뭔 줄 아나? 당신은 여기서 10년 형을 살아도 나보다 먼저 (교도소 밖으로) 나간다는 거다.”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여성들이 있는 한, 폭력의 연쇄가 끊이지 않는 한 그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여성들은 언제든 감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출소해도 이 교도소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