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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손녀가 카메라에 담은 할머니의 삶 - <할머니의 먼 집> 이소현 감독
윤혜지 사진 오계옥 2016-09-29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 이소현 감독은 그길로 외할머니가 있는 화순에 내려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낸다. <할머니의 먼 집>은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서 자라 할머니에게 강한 애착을 가진 이소현 감독이 할머니의 지금을 보듬고 얼마나 더 남았을지 모를 할머니의 미래를 함께 준비하고자 만든 다큐멘터리다. 할머니에게 오랜 시간 보살핌을 받아온 손녀의 고마움과 애정이 짙게 묻어난 작품이다.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프로젝트 마켓에서 KB국민카드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다.

-할머니는 요즘 어떠신가.

=벌써 아흔여섯이 되셨다. 기력이 많이 쇠하셔서 지금은 병원에 계신다. 이젠 요양사들이 항상 곁에 있어주어서 한달에 한번 정도 2, 3일씩 할머니 곁에 머물다 온다. 다른 어른들은 몰라도 나만큼은 단번에 알아보시더라.

-할머니는 영화를 보고 뭐라고 하시던가.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했다. 할머니께 서울에서 상영하니까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했는데 절대 안 오시려 하셨다. 서울에서 엄청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 보러 올 거라고 했는데 결코 믿지 않으시더라. (웃음) 결국 온 가족이 나서서 할머니를 꼬여 서울에 모셔왔고 극장 가득한 관객을 보고 할머니가 충격을 받으셨다. “우리 손지 말이 참말이었다”고 동네에 자랑을 하셨다. (웃음) 살아 있는 외숙의 모습을 보실 수 있어 좋아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향해 박수를 쳐준 데에도 무척 감동하셨다.

-<할머니의 먼 집>을 만들기 시작한 계기가 있나. 할머니의 무엇을 어떻게 찍을 생각이었나.

=그때 나는 베트남 NGO에서 일하다 한국에 들어와 국내 NGO에서 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취업이 쉽지 않아서 할머니가 계신 화순에 가 있었는데 살펴보니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많이 없었다. 처음엔 할머니와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했는데 요즘 카메라는 동영상을 찍기에도 좋아서 할머니의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영상으로 찍기 시작했다. 그러다 단편을 만들 생각을 했고, 할머니에게 꼭 극장에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화순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전주국제영화제에 보냈는데 떨어졌다. (웃음) 별 생각이 없었는데 심사 떨어지고 나니 혹시라도 할머니가 영화를 못 보시게 될까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마당에 모기향 피워놓고 할머니와 둘이 상영회를 열었다. 할머니는 좋아하셨지만 동시에 무척 궁금해하며 물으셨다. “사람들이 이런 걸 뭣하러 본대?” “할머니가 예쁘니까 그렇지!” (웃음)

-촬영 과정은 어땠나.

=2년6개월 정도 찍었다. 일주일씩 할머니 집에 있기는 했지만 일주일 내내 촬영을 하자니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시골 어른들 사는 패턴이 비슷하다 보니 다 찍을 필요가 없겠더라. 그래서 이틀을 풀로 찍고 다른 날들은 그냥 할머니와 함께 쉬었다. 찍다 보면 뭔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나중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더라.

-촬영과 편집, 사투리를 살린 내레이션과 자막까지 영화는 ‘할머니’라는 대상과 굉장히 밀착해 있다.

=하도 무계획으로 찍어둬서 어떤 서사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김형남 편집감독님과 교대로 편집을 하면서 지금의 버전으로 완성했다. 할머니가 느꼈을 고독이 너무 비참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그걸 플롯에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내 영화가 보여줘야 하는 건 할머니의 지금의 삶이었다. 외숙이 돌아가신 뒤 할머니가 괴로워하시면서 펑펑 우시는 장면도 있었는데 편집감독님이 넣자고 한 걸 나는 빼자고 했다. 할머니가 술을 마시고 계신 장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명절에 친척들이 다 같이 모여 있는 장면은 할머니가 나와 둘이 있을 때, 할머니가 다른 가족들과 있을 때 할머니의 위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잘 보여줄 수 있었다. 편집감독님이 잘 살려주신 장면이다. (웃음) 내레이션 시나리오를 짜며 가장 경계했던 것은 내가 착한 손녀로 보이면 안 된다는 거였다. 나만 할머니를 위하는 사람이 아닌데 자칫 관객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스탭들 의견에 따라 자막도 처음엔 표준어로 넣었는데 그렇게 해놓고 보니 외화 보는 기분이 들더라. 할머니가 하는 말의 뉘앙스도 잘 살지 않아서 내가 고집을 부려 사투리 표현대로 자막을 바꾸었는데 지금이 더 만족스럽다.

-어린 시절의 일기가 적절한 타이밍에 삽입돼서 일종의 챕터와 같은 역할을 한다.

=다큐멘터리에 활용할 만한 것을 찾다 보니 어린 시절 일기가 떠올랐다. 정말 할머니 얘기뿐이었다. 내가 할머니와 평생을 함께했음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텍스트였다. 할머니를 대하는 내 마음은 그때와 지금이 똑같다. 어릴 때도 늘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을 걱정했고, 제사 등의 문제로 할머니가 화순에 가 계실 때면 나는 외로움에 무척 힘들어했다. 이 영화의 주제도 ‘할머니가 자살 시도를 해서 너무 슬펐다’, 이게 다인데 다큐멘터리를 이렇게 찍으면…. (웃음) 나의 유치한 마음을 조금 상쇄해보고자 애쓴 흔적이기도 하다. (웃음)

-어머니는 고령의 할머니를 자연 상태로 계시다 편히 가시도록 하자는 주장을 펴고, 감독은 매주 영양제를 맞혀드리면서 어떻게든 할머니에게 생기를 더해주려고 애쓴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심각하게 갈등한다.

=태어나서 엄마랑 처음 싸워본 거였다. 엄마는 “네가 암만 할머니를 생각한다고 해봤자 너는 외손녀고 나는 딸이라고” 그러셨다. 그때 엄마가 너무 다른 사람 같았고 엄마와 이 문제로 화해하지 않으면 내가 엄마를 평생 못 볼 것 같았다. 얘기도 나눌 겸 촬영 소스도 만들 겸 그 장면을 찍었다. 엄마와는 결국 합의를 보았지만 그 장면을 넣을지 말지 고민이 많았다. 세상에서 엄마만큼 할머니를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데 엄마가 악역처럼 보일까봐 걱정해서다. 그렇지만 엔딩에서 엄마가 할머니의 머리를 직접 잘라주는 장면으로 우리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전달될 거라 생각했다.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많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다큐를 찍는다고 했을때, 그러면 세상이 이미 좋아졌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먼 집>을 관람한 손자, 손녀 관객이 영화 보고 할머니 집에 다녀왔다는 후기들을 접하고 세상의 변화는 이렇게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구나 싶더라. (웃음) NGO에서 일하며 분쟁 이슈 영상을 만들고 그걸 한국에 상영해 후원을 받아낼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은 게 최종 꿈이다. 당장은 프로듀서로 남태평양 보라보라섬에 관한 다큐를 기획해볼까 생각하고 있다. 그 섬엔 일년 내내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레레’라고 부른다. 레레는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가 이 아이를 축제 기획자로 키우겠다고 결심하면 생물학적 성과 상관없이 무조건 여자애로 키워진다. 그리고 평생을 축제를 위해 일하며 사는데 레레들은 그런 삶을 무척 영광스럽게 여긴다. ‘그런 삶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호기심만으로 접근하면 안 될 것 같아 고심 중이다. 연출을 맡을 친구도 나도 아직 대상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일단 내년 1월에 거기 가서 얼마간 지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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